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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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젊은 날의 피카소 전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피카소의 초기작을 보면서, 저 정도 그림이야 내가 발로 그려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은 훗날 그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을 받은 후에 재평가를 받은 작품인 것이다.

 

말하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는지? 그리고 또 잠깐 아래층에 내려간다고 한 남편이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이 정도는 돼야 기담 혹은 괴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아마 범인(凡人)이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했다면 술좌석의 농담 혹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쓰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집 <도쿄기담집>은 최신작이 아니다. 2005년에 나온 책으로 모두 5편의 ‘기담’스러운 단편 소설집이다. 나는 맨 먼저 맨 마지막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시나가와라는 지명을 알 리가 없고, 뒤편에 달린 원숭이에 시선을 끌었다. 안도 미즈키라는 여성이 기억상실 때문에 병원을 찾고, 상담사를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을 거쳐 아주 오래 전, 고교시절 자살한 학교 후배에게서 모든 것이 연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착역에는 도쿄 시나가와의 말하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말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녀가 다시 기억력을 되찾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5편의 단편 중에서 <하나레이 해변>이 가장 재밌었다.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이라는 곳에서 상어에게 물려 다리를 잃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된 어느 청년의 어머니 사치의 이야기다. 하와이에서 윈드서핑이 목숨까지 걸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치는 예전에 미국 생활 덕분에 현지에서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런 세심한 장치까지 배려해 주다니, 역시 하루키답다. 아니면, 본인이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2년간 체류한 경험 덕분인지 미국 생활에 대한 그의 감상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하루키의 재즈 사랑도 그 덕분인지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상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 그녀가 호놀룰루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 사치의 과거를 되짚어 가는 품이 고수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런 부담 없이 타인의 삶을 엿보는 그런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주인공/타인의 삶에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이저리즘(관음증)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들의 기일 즈음해서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며칠씩 보내곤 하는 그녀에게만 왜 외다리 서퍼가 보이지 않는건지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야 할 의미 있는 여자의 수는 세 명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남자 준페이의 고민 역시 재밌다. 어차피 깨지기 마련인 터부를 마련하는 고수 하루키는 한 번의 만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원 스트라이크 이후 투 스트라이크를 준비한다. 정말 딱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준페이는 생각하지만(물론 육체관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리에는 자신의 직업도 알려 주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발을 보여주는지 하루키답다. 대뜸 기리에가 직업 킬러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쉬운 직업으로 정할 리가 없지. 얘깃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결국 준페이는 기리에의 자극을 받아 만날 자리를 옮겨가는 콩팥 모양의 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창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영감이 아니라 어떤 식의 자극이라는 하루키 식 고백일까? 미스터리한 그녀의 실종 역시 예측가능한 좌표상에 자리 잡고 있다.

 

하루키 소설집의 공간적 배경은 소설집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대도시 도쿄다. 인구 천만명이 사는 예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스펙터클하게 변화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하루키 식 기담의 원천이 아닐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셀카가 뭐라고 남들보다 압도적인 셀카를 찍으려다 절벽에서 추락사하고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이 이야기야말로 기담이 아닌가.

 

판에 박힌 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떠나 자발적 홈리스가 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식상하다. 일상의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면세계의 일탈 욕구가 빚어낸 이야기도 이제는 설명 가능하다. 어느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던 이야기나 상식도 시간이 지나가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폭도나 정신병자로 치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짜 이 소설집에서 하루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상식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풍 또는 스타일이 아닐까. 정확하게 꼭 집어서 이게 바로 하루키 스타일이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재즈와 위스키를 사랑하는 여피 스타일적인 삶의 방식 말이다.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처럼 상실 가운데서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물론 그러기 위해선 금전적 여유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키는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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