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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다작으로 유명한 그의 최근작 <몽환화>를 읽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내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꿋꿋하게 지키면서 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창작해내는 작가의 재능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하긴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 <몽환화>의 결말에서 이런 재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슬쩍 드러내기도 했다. 역시 고수답다.
전설에나 존재하는 노란색 나팔꽃에 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몽환화>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별 개의 사건으로 출발한다. 도쿄 시내 복판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과 중학교 2학년 소년이 마주한 아스라한 기억 속의 첫사랑이라고나 할까. 고수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반드시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그러니 독자는 주의할 지어다.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고, 초반의 설정된 이야기가 등장해서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기능을 하니 말이다.
그렇게 두 개의 사건은 많은 시간이 흘러 핵심 사건인 아키야마 슈지 사건에 도달한다. 작가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에게 사건 해결의 임무를 부여한다. 한 명은 한 때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를 꿈꾸었던 약관의 아키야마 리노, 그녀는 슈지 할아버지의 손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첫사랑의 주인공인 가모 소타군. 둘은 인생유전이라는 삶의 거친 바다에서 표류 중인 결핍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심인성 현기증으로 인생의 목표였던 수영을 그만 둔 리노와 후쿠시마 지진으로 원자력 공부에 인생을 걸었던 소타는 불가피하게 인생 좌표의 수정을 해야할 운명이다. 이 둘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꽃을 사랑하던 아키야마 슈지 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캐는 중차대한 과제가 주어졌다.
아, 여기에 사이드킥 한 명도 빼놓을 수가 없다. 사건 담당 하야세 형사다. 자신의 과오로 가정파탄에 이른 하야세 형사는 아들 유타의 보은을 한다는 의미로 사건 해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세 명의 주인공이 소설 <몽환화>를 이끌어 가는 명실상부한 삼두마차다. 물론, 하야세의 개입에는 아들 유타의 강력한 압박도 단단히 한몫했다. 그리고 보니 하야세의 개입이야말로 의외의 개연성이라고나 할까. 소설을 읽고 나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출생의 비밀부터 시작해서 살인사건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의 요소는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그보다 훨씬 더 품격이 있지만 말이다.
소설 <몽환화>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형사의 그것보다 리노와 소타의 추리력과 과감한 결단력에 더 의존한다. 아버지와의 불화라는 고전 그리스 시대 이래 해결되지 않는 가정불화의 끝에 서 있던 소타는 원자력 공부를 할 정도의 실력으로 냉철한 추리력을 발휘해서 미제 사건에 뛰어 든다. 리노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탐문을 하고 주변 인물을 동원해서 어쩌면 사건의 키를 쥐고 있을 지도 모르는 미지의 여성 이바 다카시(소타의 첫사랑) 추적에 나선다. 예전 같으면 어림 없었을 시간과 노력의 수고를 최근에 발전된 IT 기술인 휴대전화, 이메일 그리고 블로그나 SNS 서비스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 나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문득 또 앞으로 20년 뒤에는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모습을 대신할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소설 <몽환화>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설정된 과거의 유산이 그들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작가는 <몽환화>에서 이를 빚이라는 이름의 유산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미래가 되고 또 어느 순간엔가는 과거가 되는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현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지금의 모습도 결국 과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었던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진짜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를 노란색 나팔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멋진 추리물을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몽환화>를 읽는 최고의 재미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는 또 눈길이 가는 점이 있다. 절대 사소한 사실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캐릭터의 특질을 나타내는 복장에 대한 설명, 누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야말로 그 사람을 상징하는 코드가 아닐까. 하야세 형사가 고급 호텔에서 리필이 되는 비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탐문을 하기 위해 가게에 들러 필요도 없는 커피를 마시고 화과자를 사는 소타군의 모습에서 일본인 일반을 분석할 수도 있다. 미국 작가라면 이런 사소한 일상 대신 돌직구를 날리지 않았을까? 아들 유타군의 은인에 대한 의례적인 연하장과 서신 교환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이마저도 요즘에는 일반화된 이메일로 대신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여느 소설책처럼 술술 읽히는 마성의 내러티브 전개가 참 마음에 들었다. 아직 덜 여문 듯한 캐릭터들의 활약에 조금 의문이 가긴 했지만 신구 세대를 오가며 탐문하는 고전 스타일도 빠트릴 수 없는 재미였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올드 스쿨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최신 기술의 도입에 있어서도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는 중용의 미덕을 다룰 줄 아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설의 꽃 노란색 나팔꽃인 <몽환화>를 최대한 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표지도 마음에 든다. 트랜스페어런트 스타일의 표지의 있고 없고 차이가 이렇게 대단한지 또 몰랐다. 참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