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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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대학시절에 선배형으로부터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데 무려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 책을 가지고 갔었는데, 오랫동안 읽지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은 기억이 난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각성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불의에 맞서게 된다는 이야기였던가. 너무 오래 전이라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갑오년 청마의 해에 러시아의 문인이자 혁명가였던 막심 고리키의 단편 소설집과 만나게 됐다.

 

처음 맞는 표제작 <마부>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설정으로 읽힌다. 하늘 아래 독창성을 지닌 작품은 없다고 했던가. 읽으면서 왠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바로 연상됐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마부의 꾐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고, 약탈한 부를 바탕으로 성공해서 시장 선거에까지 나가게 되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 때문에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는 주인공.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게 다 꿈이더라는 구조다. 반동적인 짜르 체제를 지지하던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속살을 짧은 단편에서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고리키의 비판적인 시선이 예리하게 다가왔다. 러시아 지배계급이 누리고 있는 재화의 축적이 과연 정당했느냐에 대한 작가의 지적은 시대를 넘어 고전이 갖는 보편성의 체화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아름다움>에서는 날선 혁명가의 감성과는 다른 탐미주의자의 그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연히 만나게 된 여인을 추종하게 된 절망의 시인은 화자까지 숭배에 끌어들인다. 밑도 끝도 없이 약속을 잡은 시인은 화자를 미로 같은 공간 속을 통해 어느 발코니로 인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그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예정된 대로 매료된다. 현대 작가들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의 창조를 위해 외계인까지 동원하지만, 19세기 러시아 작가에게 그만한 창조적 상상력을 기대하기엔 아마 무리였으리라. 무언가 좀 더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 고리키는 돌멩이 세례로 화답하며 멋지게 마무리짓는다. 하긴 천상의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지.

 

<아름다움>이 그런 여인이 가진 지고의 아름다움에 방점을 찍었다면, <푸른 눈의 여인>은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들을 봉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린 여인에게 경찰서 부서장 조심 키릴로비치는 조소의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이 와 닿는 순간, 냉정한 남자의 마음은 경의로 뒤바뀐다. 고리키는 우리가 어떤 판단에 앞서 원인과 결과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역시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쿨리나 할머니>와 맨 마지막에 실린 <이제르길 노파>의 이야기는 노년 세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면서 동시에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경계로 나뉜다. 전자에서 구걸로 바닥에 떨어진 인생들을 거두는 거리의 아쿨리나 할머니가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 아쿨리나 할머니가 보살피는 대상은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에 빠진 당대 러시아 민중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소설에서 아쿨리나 할머니는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느데, 그것은 어쩌면 짜르 압제에 맞서는 혁명 대의에 대한 고리키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소설적 상상과 분석이야말로 시대 소설을 읽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런 의도로 썼건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은 문학을 소비하는 주체의 자유이니 말이다.

 

<아쿨리나 할머니>의 이야기가 정말 현실주의에 입각한 이야기라면, <이제르길 노파>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에 가깝다. <이제르길 노파>는 첫 번 째 전설, 두 번째 자신의 삶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렁에 빠진 종족을 데리고 태양이 빛나는 스텝으로 인도하는 용감하고 당당한 단코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유대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지도자 모세의 그것과도 비교되는 불타는 심장의 주인공 단코의 모습 역시 숱한 고난 가운데 러시아 민중을 혁명으로 이끈 혁명지도자의 소설적 현현으로 보인다.

 

19세기 작가가 그린 시대상에서 여전히 바뀌지 않는 여러 부분들을 소설집 <마부>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무지한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지식인 엘리트의 편견이 내비치는 장면도 있었지만, 혁명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예상할 수 없었던 시대의 르포르타주 가치만으로도 <마부>는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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