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1
드니 디드로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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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디드로라는 인물은 아주 오래 전 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백과사전파였다는 정보 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흐릿한 기억 속의 전설 같은 인물이 쓴 소설이 바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다. 저명한 계몽철학자가 계몽시대를 인도한 백과사전 뿐만 아니라 이런 악당 소설(roman picareque)까지 썼을 줄이야.

 

중세를 주름 잡은 기사도 문학에 대한 반발로 파생된 악당 소설의 시초는 그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6세기 스페인을 풍미한 악당 소설의 양식을 바탕으로, 백과사전파의 태두답게 디드로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운명론자 자크라는 멋진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마치 자신이 가진 지식과 혜안을 좀 더 독자에게 들려주지 못해 안달난 창작가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수다쟁이 자크의 입을 빌려 18세기 프랑스의 다양한 시대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요즘으로 치면 로드무비에 해당할 상황이 자크와 그의 주인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물론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여행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디드로 역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운명이 우리를 인도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벌이는 모험과 연애담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 버디무비 스타일의 소설은 악당 소설의 원전이 되어버린 세르반테스의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그리고 그의 시종 산초 판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전지적 작가인 디드로의 너무 잦은 개입을 이 소설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꼽을 수 있겠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독자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전개와 서사 구조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만 상실한다. 자크의 주인은 자크가 들려주는 자기 하인의 러브 스토리를 끝까지 듣고 싶어하지만,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또다른 소설 속의 소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크의 러브 스토리는 뒤로 밀린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가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하는 호기심은 저 멀리 밀려나 버리고, 전지적 작가 디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자크의 러브 스토리에 개입된 두 가지 이야기인 포므레 부인의 치정 복수극과 아르시 후작의 위드송 신부 이야기는 두 가지 층위에서 18세기 프랑스 계급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힌다. 전자는 사회의 규범이 되기는커녕 타락한 귀족사회의 부정한 일면을 드러내 주고, 후자는 고귀한 성직을 맡은 성직자 역시 그들과 별 다를 게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포므레 부인의 에피소드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이었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연상시킨다. 이 정도되는 이야기라면 요즘 트렌드라는 막장 드라마의 원조격이지 않을까 싶다.

 

자크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하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또 동시에 주인의 권위를 유머스럽게 무시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 점은 수다쟁이면서도 때로는 권총이나 무력에 호소하는 법도 아는 영악한 모습이 비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하인 자크는 단선적인 캐릭터가 아닌 시대를 앞서간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물론 자크에게 허용되는 하한선은 그의 주인이 설정해 놓은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공고한 신분제 사회가 타파되기 위해선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의 큰 흐름을 위한 반세기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테니까.

 

마지막으로 독자를 위해 전지적 작가 디드로가 준비한 이야기는 바로 주인의 사랑 이야기다. 협잡과 사기결혼 그리고 배신의 드라마가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이 이야기야말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하이라이트다. 그 와중에도 디드로는 어떻게든 자크의 러브 스토리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사실 그쯤되면 독자는 이야기가 어디로 가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게 되어 있다. 워낙에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삼천포행을 수도 없이 한지라 마침내 도달한 자크의 연애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까.

 

사실 처음으로 소설의 뒤편에 실린 두툼한 해설 부분을 보고 이 정도로 필요한가 싶었으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읽다 보니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됐다. 곳곳에 달린 각주는 당대 문학가와 백과사전파의 태두 디드로가 시전하는 다양한 문학적 유희와 지식의 스펙트럼을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 개인적으로 온전한 소설 감상을 위해 타인의 해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전지적 작가 디드로와 함께 한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하게 사랑받는 고전여행으로 올 한 해 독서를 마무리하게 되어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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