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Story - 역사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닉 테일러 지음, 엄연수 옮김 / 글과생각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인터넷으로 <히즈스토리>의 저자 닉 테일러에 대해 검색해 봤다. 먼저 오래전 인기를 끌던 영국 출신의 팝그룹 듀란 듀란의 멤버가 저자로 변신했나 싶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물론 아니다. 유사 이래 남성들과 남성성에 의해 제거된 여성성의 부활과 균형을 주장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히즈스토리>를 읽고 저자가 여자가 아닐까 하는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외모로만 볼 적에 그는 상남자처럼 생겼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주류 언론에 기고를 해온 저널리스트이자 교사 그리고 에너지 힐러라는 그의 경력이 눈길을 끌었다. 맨 마지막의 에너지 힐러는 무슨 일을 하는 직업군일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닉 테일러는 남성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는 것으로 그들의 이야기인 <히즈스토리>를 시작한다. 농업생산과 그에 따른 필수적인 잉여생산을 지배 관리하게 된 남성은 인류사에서 꼭 필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인 문자 체계마저 주도적으로 행사하면서 비로소 여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훗날 개발된 독신 남성 유일신 시스템(종교)은 남성이 왜 여성을 비롯한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념 체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일신 종교가 표방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가치 체계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거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득권층의 비전의 무기가 되었노라고 저자 닉 테일러는 증언한다. 남성이 오른쪽의 정의라면, 유일신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자유롭게 왼쪽을 맡았던 여성은 자연스레 부정적이며 악당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말이다. 종교가 그랬다는 건 그나마 이해가 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게 되면서, 그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결속과 화합을 강조하는 종교는 앞장서서 권력 추구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분열과 분리를 조장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결과, 지구별과 함께 해서 살아온 인류 5,000년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피폐해져 있다. 근면을 바탕으로 한 노동 윤리에 방점을 찍은 종교는 무위의 즐거움을 인간으로부터 박탈해 버렸다.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처럼 그렇게 인간은 별 가치 없는 것들의 무한소비를 위해 노동하는 존재가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가 연상되는 놀이하고 유희를 즐기는 인간에 대한 고찰 역시 인상적이다. 인류의 존재 이유가 그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 같은 부속품이 아니라는 저자의 저술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도 인류의 진화가 현대의 식습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비만과 당뇨 같은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 그 진단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구석시 식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이었다.

 

한편 닉 테일러는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균형에 중요성을 강조한다. 01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여전히 1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0의 역할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라는 것이 <히즈스토리>가 다루는 핵심이다. 문득 어떻게 해서 남성인 저자가 우리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여성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런 이론적 귀결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닉 테일러가 쓴 대안 역사 에세이의 깨알 같은 또 다른 재미는 디테일에 있다. 저명한 영국의 정치지도자 윈스턴 처칠이 아돌프 히틀러 못지않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지적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히틀러 같은 인종차별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뿐이지 사고방식은 희대의 독재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원형감옥 팬옵티콘의 모습이 우리가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 아파트 거주습관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도 특이할만하다. 스스로 감옥살이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의 모습을 공리주의 철학자가 보았다면 뭐라고 말할지 참 궁금하다.

 

닉 테일러는 <히즈스토리>를 통해 암울하기 짝이 없는 지구별의 현재 상태를 진단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비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상태에서도 여전히 희망이 그 바닥에 남아 있던 것처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자유의지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구별의 모든 존재가 조화롭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모든 선한 의지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이야기하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는 거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닉 테일러가 <히즈스토리>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일 것이다. 과연 에너지 힐러다운 멋진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거대할 수 있는 담론을 보통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들려준 <히즈스토리>가 참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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