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번지는 곳 독일 In the Blue 13
백승선 지음 / 쉼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책 없이 그리고 여행 없이 살 수 없다는 백승선 작가의 13번째 이야기, <사색이 번지는 곳 독일의 책장>을 넘기며 슬며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독일에 대한 나의 냉온탕 경험이 배어 있어서일까. 책 내용에 앞서 목차가 궁금했다. 내가 가본 단 두 개의 독일 도시 이야기가 있나 하는 마음에. 역시 빠질 수 없는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수록되어 있었지만, 온탕 경험의 배경인 뮌헨이 빠져 있어서 자못 아쉬웠다.

 

독일 이야기의 일번타자는 한자 동맹의 중심지 브레멘이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제는 사무실에서 편하게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책에 소개된 도시 브레멘의 이모저모를 여행 블로그를 통해 정말 내가 가본 것처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역시 브레멘의 상징인 그림 형제의 동물음악대 조각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본 블로그의 주인장들도 어김없이 다른 관광객들과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며 그 멋진 사진을 찍었으리라. 그리고 보니 백승선 작가는 절대 자신이 들어간 사진은 책을 통해 보여 주지 않는구나. 아마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기 위해서일까.

 

브레멘 시의 수호자로서 여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롤랜드 상에 대한 이야기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전 유럽을 정복한 군사적 천재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타국의 미술품 약탈자로도 악명 높은 나폴레옹이 예의 롤랜드 상이 마음에 들어 자국으로 옮겨 가려 했지만 브레멘 시민들의 기지로 현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고. 하마터면 루브르 박물관에서나 볼 뻔한 운명의 롤랜드 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음은 통일 독일의 상징이 된 수도 베를린이다. 나의 독일 냉탕기의 주인공이었던 베를린.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지인이 꼭 한 번 가봐야 한다는 말에 두말없이 달려간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터키 베르가몬에서 통째로 뜯어 왔다는 신전의 규모에 그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워낙 박물관 구경을 좋아하는지라 페르가몬을 위시해서 무제움스인젤(박물관 섬)의 곳곳에 포진한 박물관을 섭렵한 추억이 돋는다. 지나가는 독일 아가씨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가 그 아가씨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뜨린 추억도. 물론 내가 아니라 카메라의 주인이 떨어뜨렸었지 아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버지의 날 휴일을 맞아 상점이 곳곳이 쉬는 바람에 사고 싶었던 버켄스탁 샌들을 결국 사지 못했었지. 그래도 알렉산더플라츠 주변을 빙빙 돌며 신기해 보이는 TV타워를 올려다보며 미처 올라갈 생각은 못했었다. 그리고 독일 의사당 옆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요란스레 몰려든 관광객들과 어울려 구 동독군복 혹은 소련군복을 입은 호객꾼들과 어울려 사진 찍는 이들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기억이 이 책을 통해 고스란히 떠올랐다. 유태인 기념비는 보스턴이나 혹은 아우슈비츠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숨길 수 없는 지난 과거를 계속해서 반성하고 그 피해를 보상하려는 독일 사람들의 양심을 반영하는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의 얼굴 형상을 한 1만 여개의 철조각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베를린 행 ICE 기차 안에서 아주 잠깐 만난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역사상 최악의공중폭격으로 그야말로 도시가 결딴난 상처를 가진 도시로, 현재 작센 주의 수도라고 한다. 왜 그 때 드레스덴에 들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중에 미국 출신의 작가로 드레스덴 대폭격을 직접 체험한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에서도 만났던 드레스덴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훗날 다시 짓기 위해 폐허가 된 프라우엔 교회의 돌들에 번호를 매겼다는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중세 변화의 시초가 되었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수도사 마르틴 루터 동상이 이 교회 앞에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드레스덴은 신교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처럼 정말 볼 것 없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로렐라이 언덕보다, 뤼데스하임의 아이스바인이나 내가 좋아하는 리슬링 그 중에서도 아우슬리스 같이 달달한 와인을 즐기며 라인강에 위치한 성들을 구경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구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된 하이델베르크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코스다. 칸트, 헤겔, 야스퍼스, 막스 베버를 위시한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괴테 같은 대문호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인사들이 남긴 흔적과 일화로 넘쳐나는 중세 대학 도시! 오죽했으면 이웃나라 일본에 본토 철학자의 길을 딴 짝퉁 이름의 길이 다 있을까.

 

, 그리고 보니 깜빡한 도시가 하나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업적을 기리며 해마다 도서전이 열린다는 명실상부한 유럽연합(EU)의 수도 프랑크푸르트도 빠질 수 없다. 10월이면 악터버페스트와 책을 좋아하는 책쟁이로서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행을 꿈꿔 본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온탕 추억의 도시 뮌헨이 빠진 것이 좀 아쉽다. 하지만, 내가 가본 곳에서는 가본 곳대로의 추억을 되살릴 수가 있어 좋았고,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못한 곳대로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주는 사색의 시간들이었다. 책읽기가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책을 통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면 이번 사색의 번짐은 나에게 만족 그 자체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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