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코미디
윌리엄 사로얀 지음, 정회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윌리엄 사로얀,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그의 글보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미국 출신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퓰리처상을 거부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도 있나? 남들은 받지 못해서 안달하는 그런 상을 거부하다니,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연상되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가 나에게 준 첫인상이었다.

 

모두 39개의 챕터로 구성된 <휴먼 코미디>는 담백하고 술술 읽힌다. 제목에 코미디가 들어가 있다고 절대 이 책을 유머 책으로 오해하시지 마라. 물론, 입가를 스치우는 그런 유머도 없지 않지만 이 책은 대공황에서 충격에서 벗어나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40년대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 이타카를 배경으로 한 잔잔한 인간 드라마다.

 

<휴먼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세상에 맞서는 매콜리 가문의 아이들이다. 장남 마커스는 당시 여느 젊은이들처럼 군에 입대해서 전쟁터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 매슈 매콜리의 부재 가운데, 올해 14살 먹은 호머는 소년 가장으로 최근에 취직한 전신국에서 전보 배달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일을 시작한 소년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참 가혹하다. 어쩌면 윌리엄 사로얀은 처음부터 전혀 해피엔딩스럽지 않은 결말 부분에 대한 세팅을 먼저 구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네 살배기 꼬마 율리시스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 꼬마는 그 덕분에 짐승 잡는 덫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하고, 살구 서리를 하러 헨더슨 씨네를 습격한 패거리에 가담했다가 신문팔이 소년 오거스트와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 집안이 가난해서 신문팔이 혹은 전보 배달원이라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일을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소년들의 모습에서 지금의 미국에서는 이제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 된 청교도적 직업윤리(work ethic)이 살아 숨 쉬던 순수의 시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에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윌리엄 사로얀은 이 담백한 소설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던 소년의 시선에서 서술한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를 억지로 밸리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소위 인종의 도가니라는 미국에서 학생에게 더러운 이탈리아 녀석라는 폭언을 내뱉는 육상 코치의 모습은 어째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어린이를 돕는 꿈을 이루겠다는 순수소년 호머가 가진 이상과 충돌하는 현실세계의 비정한 이면이 증폭된다.

 

<휴먼 코미디>에 녹아 있는 다양한 신화의 흔적을 쫓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쏠쏠한 재미중의 하나다.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험난한 귀향길의 종착점은 바로 고향 이타카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으로 탈바꿈한 캘리포니아판 이타카드림은 마커스의 전우 토비 조지에 의해 완성된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품위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던 권총강도 청년은 전신국에서 만난 톰 스팽글러 때문에 구원에 이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고민하던 마커스가 전쟁의 본질에 대해 들려준 놀라운 성찰은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도 강렬하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윌리엄 사로얀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식품점 주인장 아라 씨의 성공에 대한 강박과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삶이 부딪히는 긴장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평범해 보이는 성장소설이라는 외피를 두른 윌리엄 사로얀의 소설이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보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쩌면 이제 막 세상에 도착한 호머 매콜리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갈등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는 그래서 나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참 아름다운 소설이다.

 

저는 어른이 되면 절대로 울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인간은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때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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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4-2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인용하신 구절 참.. 좋네요. 꼭 <자기 앞의 생>의 소년이 말하는 것 같아요. 리뷰 오랜만에 올리시네요. 그래도 꾸준히 올리시는 걸 보면서 또 새삼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전 아직 하나도 안 쓰고 있거든요 ㅠ ㅠ

레삭매냐 2012-04-23 12:48   좋아요 1 | URL
책은 계속해서 읽고 있는데 미처 리뷰가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름 슬럼프라고나 할까요?

지난 주에 책을 네 권이나 읽었는데 쓴 리뷰는 하나도 없네요 ㅠ

비로그인 2012-04-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헤르메스님, 리뷰 쓰실 때 그냥 단번에 쓰세요? 저는 요새 리뷰를 어떻게 써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꾸 써야될 말을 짜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솔직히 쓰기'를 제일 위에 놓고 쓰려고 하고 있는데 음, 잘 모르겠네요. 글을 쓰게 만드는 어떤 느낌을 자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걸 감성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박민규 말처럼 다감(多感)하고 싶네요!

레삭매냐 2012-04-30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일단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마무리가 엉성하더라도 한 번에
다 쓰고자 하는 편입니다.
마치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쓰다가 마무리짓지 못하고 나중에 다
시 쓰려고 하면 어째 주저하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보통 책 읽으면서 리뷰에 담고 싶은 말들은 메모를 한답
니다. 자주 잊어 버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