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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어제 와우 북페스티벌에서 말로만 듣던 최제훈 작가의 첫 번째 <퀴르발 남작의 성>을 마침내 입수했다. 그리고 마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재밌게 다 읽었다. 지인들에게 내가 지금껏 읽은 우리나라 최고의 데뷔작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고 말해왔는데, 아무래도 한 권 더 추가해야할 것 같다. 이렇게 재미진 소설을 출간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다니, 아쉽다 아쉬워. 모쪼록 널리 알려야겠다는 투지마저 들 정도다.
최제훈 작가의 매력만점 소설집은 표제작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시작된다. 성(城)을 성(性)으로 잘못 예상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가 문체 같은 스타일보다는 구성에 중점을 준다는 점을 기억해 두었다. 후속작에도 사용된 메타픽션 기법은 표제작에서 그 빛을 발한다.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영화/소설을 이용해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도전한다. 그리고 독자는 여지없이 낚인다. 나도 그런 영화가 있나 해서 부지런히 검색을 해봤다.
현대 서울의 어느 대학 강의에서, 블로그에서,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었다는 B급 호러영화와의 교묘한 변주를 통해 허구는 현실의 경계를 슬금슬금 넘나든다. 젊은 처녀들을 아내로 맞아 죽인 샤를 페로의 잔혹동화 <푸른 수염>의 모티프를 삼아, 수백 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퀴르발 남작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 광풍처럼 몰아닥친 매카시즘에 대한 은근한 비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셜록 홈즈와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여담을 분석한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과 <괴물을 위한 변명>은 서로 공명한다. 자신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런던 출신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자신의 추리를 자신 있게 제시했다가 허방다리를 짚는 장면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아니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소재로 삼은 <괴물을 위한 변명>은 좀 더 심오하다. 메리 셸리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의 심각한 왜곡은 할리우드 영화의 괴물 캐릭터의 재생산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 작가의 분석이다. 퀼트이불 짜깁기처럼 탄생한 자신의 창조물과 사투를 벌이는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을 추적하면서, 원작가가 미처 다루지 못한 소외된 캐릭터에까지 세심한 애정을 보내는 구닥다리 호러 팬의 오마쥬라고나 할까. 캐릭터의 왜곡이라는 주제는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에서 다시 한 번 전면에 등장한다.
중세 말에 등장한 마녀사냥에 대한 고찰은 심지어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행위가 아닌 집단 폭력 때문에 얼마나 인간성이 말살될 수 있는지 최제훈 작가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마녀인지 아닌지 심판하는 방법 자체부터 비이성적이었노라고 그는 예리하게 논증한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 마녀사냥은 언제라도 홀로코스트나 매카시즘 같은 집단 히스테리를 동반한 몰이성적 변형으로 체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상 아리까리했던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해석도 명쾌했다.
이상이 문학 작품과 역사에 대한 변주였다면, 다른 이야기는 좀 더 현실세계에 가깝다. “해리성 정체감장애”라는 다중인격에 대한 전문용어까지 동원해서 평범한 삶을 살던 기러기 아빠가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자 박제>도 일품이다. 톰과 제리라는 다중인격을 지닌 주인공의 과거를 파헤치는 장면에서는 에드워드 노튼의 번쩍이는 연기가 돋보였던 <프라이멀 피어>가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친구를 사랑한 주인공의 고백을 다룬 <그녀의 매듭>, 대학시절 동아리 후배와 만난 어느 이혼남의 이야기를 그린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까지 주옥같은 단편작품의 행진에 마냥 즐거웠다. 마지막의 작가 후기처럼 보이는 마무리에는 소설집에 나온 모든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한판 난장을 벌인다. 이 모두가 유쾌하고 재밌다.
이제 비록 최제훈 작가와 첫 만남을 했을 뿐인데 벌써 그의 팬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 참 뻔뻔하다’라는 생각에 웃음이 빵빵 터졌다. 어쩌면 이렇게 있을 법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꾸며낼 수가 있을까. 이런 상상력의 원천은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이 마구 일었다. 허구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느슨한 부분이야말로 작가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타깃 포인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작가는 탄탄한 구성과 그럴싸한 이야기를 전략적 도구로 삼는다. 문학적 허구와 자신의 주관을 양념으로 곁들인 현실비판은 너무 매력적이다. 첫 번째 소설집에서 이 정도 내공을 선보였으니 어찌 차기작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마 전 인터넷신문인 <프레시안>에서 최제훈 작가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적극 추천하는 글을 보고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어느 대담에서, 소설은 밥은 아니지만 밥과 함께 먹으면 맛있는 반찬이라고 했던가. 최제훈 작가의 소설이 우리네 퍽퍽한 삶에 곁들여지면 정말 맛깔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