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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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여행기인가? 휘바~ 책을 읽기 전부터 한 가지 나의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화내지 않는다는 거지? 책의 소개를 스캔해 보니 아마 혼자서 떠난 여행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나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강원도의 모처에서 닭과 개를 치고, 자그마한 농사를 짓던 지은이가 어느 날 돈오를 하고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는 이야기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한다. 머리말에 나오는 대강의 코스만 봐도 이거 범상치 않은 여행길이 되겠구나 싶다. 동시에 그렇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만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유럽여행이란 이제는 그야말로 판타지일 테니까.

자칭 중년의 인지 무능력자라고 칭하는 작가의 정체를 오해했다.  첫 번째 기착지인 터키 편을 보고서야 지은이가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책날개에 여자 사학을 나온 걸 봤으면서도 말이다. 아마 표지의 조금은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행가방(?)을 뒤집어쓴 탓으로 돌리자. 그런데 그거 아나? 여행길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걸. 몇 번의 여행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알 테니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자.

사실 어떤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석 씨는 책을 더 풍부하게 해줄 아주 멋진 동료 여행자를 만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줄리안이라고 했던가. 천국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여행지에서 만난 동료 여행자와의 우연한 만남만큼 여행을 즐겁게 하는 것도 드물다.

사실 어떤 여행기를 읽어도 비슷하게 느끼는 거지만, 여행기에는 어떤 종류의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가. 그리고 코스는 어떻고, 어디 어디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인증샷을 찍어 남기자.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카메라가 필수적이다. 지은이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소중한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통한의 체험을 했다. 아직 여행 다니면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공감이 잘 안 되지만, 가장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아이템은 카메라가 아닐까. 베네치아에서 비엔나로 오는 열차에서 홀랑 털린 친구를 도운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이제는 누구나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여행자의 필수품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지적도 격렬하게 공감한다. 사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여행지에서 일정 속에서 그때의 느낌이나 생각을 모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기록자는 카메라가 꼭 필요하다. 나중에 기억을 머릿속의 창고에서 불러 오는데 그만한 장비가 없으니까. 게다가 예전처럼 필름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도구란 말인가.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여행자가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건 전투에 나선 병사가 소총을 잃어버린 것하고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터키와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거쳐 목적지 핀란드를 향해 거침없는 행군을 계속하는 지은이가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더해지는 여행의 피로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여행지에서의 사치로 맛있는 저녁 식사와 홀로 쓰는 숙소를 꼽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 모두 비용이 문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냥 문득 떠난 여행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일까? 아니면 여행 에세이를 찍을 작정을 하고 여행을 나선 걸까. 후자라면 출판사에서 지원을 받았을 테니 비용 문제는 다른 여행자들보다 낫지 않을까? 참 궁금한 것도 많다. 어쨌든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을 대비해서 항상 드는 의문이 바로 ‘그래, 여행 버젯이 모두 얼마입니까?’인데 불친절하게도 어느 에세이에서도 그런 걸 알려 주지는 않더라.

개인적으로 다른 여행지에 대서는 이미 다른 여행 에세이를 통해 접한 적이 있어서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는데 아무래도 여전히 낯선 발트 3국 편이 궁금했다. 다만, 최종 목적지 핀란드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과감하게 생략하고 건너뛰어 좀 아쉬웠다. 물론 장기간 여행의 말미에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하더라도 당장에 내 몸이 피곤하면 귀찮은 법이니까.

외국여행이 일반화되면서 범람하는 여행 에세이와의 변별점을 기대했는데 사실 그런 점은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냥 동료 여행자의 편안한 글쓰기에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하긴 그런 평범함 속에 진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래도 유럽 여행은 무리인 것 같고, 가까운 곳이라도 한 번 바람이나 쐬러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보니 강원도도 내겐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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