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
토미 바이어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한국의 이십대 청년들의 탈출 통로가 고시와 로또라는 말에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통로 중의 하나인 로또에 대한 환상은 그들뿐만 아니라 경제관념을 가진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뜨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 지갑 속엔 주말에 당첨확인을 위해 고이 접어놓은 로또가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독일 출신의 작가 토미 바이어의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의 표지에는 고양이 일러스트와 모두 8개의 동그라미에 들어 있는 숫자가 등장한다. 이거 애완동물에 관한 소설인가? 아니다. 프리랜서 카탈로그 제작자로 의사 아내에게 얹혀사는 남자 로비 알만의 로또 당첨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로비는 사실 백수다. 그나저나 ‘로또 당첨’이라는 표현이 바로 뇌세포 속의 시냅스를 자극한다. 이거 재밌겠는걸.

그런데 문제는 이 로비라는 사내가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점이다. 아마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평범하면 안 되겠지. 불행(?)하게도 로비가 죽도록 사랑해 마지않는 베스페(진짜 이름 레기나의 애칭이란다)는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다. 어, 이 남자 셔터맨인가? 부럽네 부러워. 그렇게 잘난 아내에다가 로또까지 맞았으니 더 바랄 게 없겠구먼.

요렇게 이야기가 되면 소설 구성의 맥이 빠지겠지? 로비가 로또에 당첨된 순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레기나와의 관계는 이미 그전부터 언제 터지기만을 기다리던 시한폭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인 사이의 폭발은 어느 특정한 사건의 발생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불만 때문이라고 하니까. 이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제 그들의 삶을 옥죄어 온 모든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에 로비는 비참한 결별의 순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것은 타이밍의 문제이고, 그놈의 말이 화근이었다.

작가 토미 바이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떻게 로비가 레기나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녀가 원래 있었던 애인 대신 자신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자신 생애 있어서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조용한 회상조로 고백한다. 아, 그럼 로또는? 그녀와 듣기만 해도 사랑이 퐁퐁 솟을 것만 같은 남프랑스의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세상을 모두 얻었던 시절에 대한 로비의 절절한 사연이 이어진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620만 유로, 계산기가 바쁘게 돌아간다. 지난 금요일자 환율로 계산해 보니 자그마치 우리 돈으로 95억에 달하는 거액이다. 그중에 1/10만 있어도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재산이 생긴 로비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별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고민을 빠뜨리지 않는다. 거리의 걸인들에게 10유로짜리 지폐를 뿌리고, 돈이 없어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우며,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경제적 곤궁 때문에 미처 사지 못했던 첨단 음악 장비며 음반, 아이팟을 사는데 흥청망청이다. 아, 물론 때깔 좋은 우주선 같은 BMW도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물 쓰듯 돈을 쓰면서도 한편으론 갑자기 졸부가 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점잖은 척하는 쁘띠부르주아 속물근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자신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로 그들을 시험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기가 막혔다. 연금생활자로 인색을 모토로 사는 아버지를 찾아가 보려고도 하지만, 보나마나 핀잔이나 받을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자 발길을 돌린다. 물론 곧바로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만. 자신과 함께 로또 당첨의 영예를 안은 전 동료 에키 에게는 축하보다는 골탕을 먹이기 위해 재산분할 신청을 하지 않은 에키의 아내 클라우디아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리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은 사랑하는 레기나와의 파탄으로 치닫는 관계에 비하면 부수적일 뿐이다. 예정된 파경을 두려워하듯, 로비와 레기나는 전화보다는 문자수신이라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한다. 이렇게 전화 혹은 직접 대면 대신 이런 간접 전달의 방식이 회복 불능의 단계로 접어든 로비-레기나 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거의 도달했다고 믿은 낙원에서 강제 추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역설적이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깨진 관계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로비는 망연자실하다.

카탈로그 제작 의뢰로 나선 로비의 북이탈리아 여행은 레기나를 잃어버린 자책과 반성, 그리고 자아탐색을 위한 로드무비 촬영이다. 로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뭘 봐도, 뭘 먹어도 온전하지 않고 즐겁지 않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는다. 우주선 같은 BMW 속에서 레기나의 미친 존재감은 더욱 황량하게 다가온다. B.C.와 A.D.처럼 레기나와 함께 있을 때와 그녀의 존재를 상실한 뒤의 차이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낙원에서의 추방은 더 괴로운 법이다.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의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엄청난 금액의 로또 당첨자를 덮친 불행에 대한 서사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이 생겨서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던 물건들을 사대고, 값비싼 와인을 물 마시듯 마시지만 틀어져 버린 사랑의 갈증은 깊어만 갈 뿐이다. 간단한 진리지만 그런 물적 소비욕구의 해소가 심리적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로비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더라면, 레기나와 계속해서 행복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로또에 당첨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관계는 부서졌으니까. 레기나는 그렇게 로비의 곁을 떠나 버리고, 그저 자신을 위로해줄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았을 뿐.

지난주에 샀던 로또는 휴짓조각이 됐다. 어쩌면 로비 같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를 작은 종잇조각의 행복한 유효기간은 달랑 일주일이었다. 단돈 오천 원으로 그 정도의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괜찮은 것 같다. 10만 원 이상은 당첨되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오늘 일주일치의 행복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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