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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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우리가 흔히 버트런드 러셀이라고 부르는 영국 출신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그리고 반전운동가로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석학의 공식 이름이다. 게다가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가지고 있다. <런던통신 1931-1935>은 지난 2005년에 <인간과 그밖의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Mortals and Others>의 개정판이다. 6년 전에 나온 책이 비해 엄청 뚱뚱해졌다.

<런던통신>에는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모두 1931년에서부터 1935년까지 5년간 발표된 135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책을 읽기 전에 항상 목차를 꼼꼼하게 살펴보곤 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글은 <나폴레옹이 행복했더라면>이었다. 80년 전의 교육 현장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은 불행했나 보다. 아이들의 즐거움은 기성세대는 허용할 수가 없었던 걸까? 러셀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애정과 상식 그리고 착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문한다. 행복의 비결이 그렇게 간단하다니! 인류사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위인이나 영웅들의 유년 시절엔 잔혹한 요소가 숨어 있었다고 러셀은 꼬집는다. 러셀의 말대로 그런 요소가 성취의 원동력이 되었을진 모르겠지만, 불행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20세기 초반에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볼 때 여전히 신생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미국과의 비교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노인들의 ‘소싯적’ 경험 타령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보다도 세월은 더 많이 산 경험에 기인한 선입견을 경계하라고 러셀은 주장한다. 유럽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런 경험이 없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창조성이야말로 저물어 가는 제국 영국을 대신해서 신흥국가 미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유럽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도 빼놓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면서 느낀 점을 러셀과 공감하다니 영광이다. 관광객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이 관광수입을 올려 준다는 명목으로 현지인들의 일상을 방해할 권리가 있던가? 우리는 과연 그들 나름의 규범과 질서를 준수하면서 관광의 즐거움을 찾고 있는 걸까?

<돈을 향한 공포, 돈에 의한 공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병폐 중의 하나인 금전만능주의를 경고한다. 교육 시스템과 영화 같은 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 금전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다른 모든 가치를 초월한 성공의 지표로 인식되는 세태를 이 철학자는 한탄한다. 게다가 소위 말하는 부자들이 한 세기 전의 부자들처럼 교양과 문화 면에서 존경받을 만한 행태를 보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공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고흐나 렘브란트의 유산은 자본의 증식을 위한 투자의 대상일 뿐이다.

진보주의자였던 러셀은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교육과 경제 민주주의가 따르지 않는 정치 민주주의는 엉터리라고 선언한다. 대중의 교육과 경제적 소외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온다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의 일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러셀은 민주주의 완벽한 체제라는 동의하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위험하다고 밝히고 있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다양한 주장을 드러낸 석학의 면면을 짧은 글에 담기란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삶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지난 세기의 산 증인이 들려주는 에세이의 울림은 그래서 더 깊다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만난 러셀의 텍스트가 에세이라는 형식이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고 쉬워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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