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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드디어 하진 선생의 장편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이달 들어 집중적으로 하진 선생의 책에 빠져 있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그동안 그의 책이 넉넉하게 출간이 돼서 당분간 하진 선생 앓이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하진 선생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기다림>과의 만남은 황홀했다.
소설 <기다림>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하진 선생이 창조한 가상의 공간 무지시에 사는 군의관 쿵린은 간호사 우만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린은 유부남이고, 특별한 이유 없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그를 인민법정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별거한 지 18년이 되어 자동으로 이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진 선생은 실제로 있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18년의 오랜 기다림 속에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린의 아내 수위는 시골 마을 어춘에서 병든 시부모를 봉양하고 딸 화를 홀로 키운다. 부모의 설득으로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지식인 쿵린은 전족을 한 시골뜨기 아내 수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발이 예뻐야 미인으로 인정받던 구시대의 상징으로 작가는 전족을 선택한다. 구습을 딛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하는 신국가 중국이지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매끄러운 문장으로 하진 선생은 꼬집는다.
이런 수위와는 대조적으로 직장인 군병원에서 만난 우만나는 젊고 건강한 매력의 소유자다. 첫사랑으로부터 시련을 당한 만나는 유부남 쿵린에게 마음이 끌려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고지식하고 우유부단한 쿵린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유부남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만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하진 작가는 주인공 쿵린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심리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통해 가정도 지켜야 하고, 동시에 만나와의 사랑도 갈구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기술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은 오히려 해가 되는 걸까? 그래서 쿵린인 조강지처 수위와의 이혼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그저 ‘기다림’이라는 지극히 수동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어쩌면 쿵린과 만나에게 기다림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문화혁명이라는 시대의 파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두 불량남녀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결국, 쿵린은 오랜 기다림 끝에 수위와 이혼하고 만나와 새살림을 차리고 아이도 낳지만, 피곤하고 짜증나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내기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의 세월은 만나와의 사랑마저도 휘발시켜 버리고, 린은 불타는 사랑보다는 평안을 더 선호하는 중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한다. 그리고 시골을 떠나 무지시에 새로운 삶을 꾸린 수위와 장성한 딸 화를 찾는다. 이 부분에서는 작가의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는 유교적 사고가 읽혔다. 일종의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기다림>의 성공으로 하진 선생은 비로소 미국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과연 서구인의 눈으로 본 쿵린과 우만나 그리고 류수위의 삼각관계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한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간주되던 이혼이 이제는 일상이 된 마당에, 18년이나 기다린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잡히지 않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신기루를 쫓던 이들이 마침내 그 사랑의 결실을 손에 넣었을 때, 남은 건 뻑뻑한 현실뿐이었다. 하진 선생의 담백한 문장이 엮어내는 소박한 삶의 비밀은 참 매력적이다. 그러니 그의 책에 점점 더 빠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