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의 탈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오래전에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보고 리뷰를 남긴 적이 있다. 지금 보니 장황하게도 썼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런 극적 이야깃거리를 소설로 쓰면 좋겠다 싶었는데 조정래 선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이 바로 오늘 단박에 읽은 <사람의 탈>이다.
1944년 6월 6일, 나치 독일 제3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서유럽 해방을 위해 고대해 마지않던 제2전선이 열렸다. 이날 잡힌 나치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 사진과 그에 대한 기록이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의 모티프로 작용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소설은 1939년 만소국경의 노몬한에서 벌어진 소련과 일본의 충돌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는다.
한 때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일본 관동군은 소비에트의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기계화 병단과 맞붙었다가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중국에서 군벌집단을 상대해온 관동군은 오로지 황군 정신으로 소비에트의 전차대에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계속되는 침략전쟁으로 병력 부족에 직면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사지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조선에만 주둔하고, 돌아오면 면 서기직은 준다는 달콤한 제안을 남발한다.
그렇게 노몬한 전선에 파견된 주인공 신길만은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무지막지한 소련군을 상대한다. 황군에게 항복이나 포로가 되는 것은 수치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일본군이 옥쇄를 감행하지만, 신길만과 일단의 조선 청년에게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아버지가 전장으로 향하는 길만에게 화두처럼 던진 총알을 피하는 살아남는 게 최고의 선이다. 동귀어진하자는 옥쇄 파트너를 찌르고 길만은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기미독립선언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세대에 해당하는 신길만은 소작농의 자식이라는 계급적 이유로 인해 징병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무산계급은 희생의 대상일 뿐이다. 일본의 통치가 영원할 것 같았던 변절의 시기에 그들이 과연 조국 독립의 꿈을 꿀 수가 있었을까? 소련군의 포로가 된 길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소련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의 마수에 맞서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된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가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포로수용소 생활 끝에 동방대대라는 이름으로 노르망디 전선으로 파견되고 미군의 포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조명한다.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을까.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개연성과 상상을 더하긴 했지만, 정말 그럴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역경을 거쳐 살아남은 길만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은 참으로 가혹했다. 일본, 소련 그리고 독일은 모두 주인공 신길만을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고, 나라 없는 백성은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비애를 조정래 선생은 예리하게 짚어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라 그런지 확실히 책은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왠지 결혼식 피로연에 가서 뷔페를 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언가 많이 먹은 것 같긴 한데, 헛헛한 느낌이 든다. 노몬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역사의 큰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의 기구한 운명이 묻혀 버렸다는 느낌이랄까.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마음에 들면서도, 2% 부족함 느낌이다.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신길만네가 포로수용소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떠올렸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졌을까? 주인공 신길만의 개인적 고뇌와 간난을 좀 더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되는 투항 그리고 연이은 적(敵)으로의 변신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식민지 청년의 애환에 보다 방점을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소설을 읽던 중에 문득 “인두겁”이란 말이 떠올랐다. 보통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말이, 총탄이 빗발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처럼 갈리는 순간에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몇 번의 서로 다른 인두겁을 뒤집어써야 했던 어느 무국적자의 비운과 공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