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
알바로 무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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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자로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 대한 천착은 에두아르노 갈레아노에서부터 시작되어, 루이스 세풀베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로베르트 볼라뇨 그리고 드디어 알바로 무티스에까지 도달하게 됐다.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어 문화권의 글들보다 조금은 생소한 스페인문화권의 문학이 대할수록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절친이기도 한 알바로 무티스 역시 콜롬비아 출신 작가이다.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외교관 출신의 아버지 덕분에 주재국이었던 벨기에에서 자라면서 유럽 문화에 심취되었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유럽 편향적인 취향과 특히 나폴레옹에 대한 숭배를 그의 역작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을 통해 엿볼 수가 있다. 다국적 기업인 스탠더드 오일사와 미국 영화사의 라틴 아메리카 총판에서 일한 다양한 경험이 그가 창조해낸 자신의 페르소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에 잘 녹아 있다.

시와 산문을 주로 쓰던 알바로 무티스는 은퇴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설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60대에 총 7편의 마크롤 가비에로 시리즈의 신호탄인 <제독의 눈[雪]>을 발표해서 문단의 이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번에 나온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에는 그중에서 모두 세 편의 가비에로의 모험기가 실려 있다. 자, 이제 본격적인 글 읽는 방랑자 가비에로의 세상 주유기를 따라나서 보자!

가비에로의 첫 번째 탐험인 <제독의 눈>의 프롤로그에서 어떻게 해서 내(알바로 무티스)가 뱃사람 마크롤 가비에로의 일기를 입수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클리셰가 등장한다. 슈란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재소를 찾는 가비에로의 탐험이 글의 중심이다. 우리의 주인공 마크롤 가비에로는 쉴 새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지난 세기 지식인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가비에로는 영락없는 작가의 아바타로 움직인다.

<제독의 눈>은 명백하게 19세기 말, 콩고 탐험을 배경으로 한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심연>을 연상시키는 가운데 “행복을 찾으려는 열정적인 소망”을 가진 이들의 탐험을 기술한다. 무티스는 차례로 가비에로가 승선한 배 위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비에로의 일기 형식을 빌어 친절하게 나열해준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이바르와 교활하고 인내심 많으면서도 파렴치한 선장 일행은 끝없는 초록빛 밀림의 터널 속으로 뛰어든다.

몽환적 에로티시즘에 사로잡히고, 참호열에 걸려 죽을 뻔한 체험 그리고 디젤 엔진을 장착한 바지선을 타고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줄기를 타고 가는 여정 가운데 가비에로는 끝없이 자신의 모험기를 기록한다. 오대양 육대주를 거침없이 누빈 그의 기록에는 왠지 모를 야생적 초연함이랄까, 그런 게 묻어 있다.

도무지 시간과 공간을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사실주의와 판타지의 결합이라는 라틴 아메리카 작품 특유의 주술적 리얼리즘의 향연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알바로 무티스는 기존의 주술적 리얼리즘에, 자아의 섬망(譫妄)이 뒤섞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미몽의 세계를 덧붙인다. 그는 보드카와 여자만이 구원이라고 적었던가? 시리즈마다 등장하는 구원의 여인상 1호는 플로르 에스테베스라는 여성이다. 어찌 보면 미련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어지는 연작에서 세세하게 드러난다.

결국, 가비에로의 슈란도 탐험은 총체적인 실패와 파멸로 끝나고 만다. 그 뒤에는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지만, 그것조차 내러티브에 무슨 영향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쓴 대로,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무관심”과 해방된 강물의 에너지는 가비에로의 실패를 통째로 삼켜 버린다.

두 번째 소설인 <비와 함께 오는 일로나>는 <제독의 눈>에 비해 조금은 독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슈란도라는 미지의 공간 대신, 파나마시티라는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해서 마크롤 가비에로는 기상천외한 사업을 벌인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에 판탈레온 대위가 있었다면, <일로나>에는 우리의 주인공 가비에로와 그의 애인이자 동업자 일로나 그리고 약삭빠른 롱기누스 삼각편대가 손님을 기다린다.

폴란드와 마케도니아 출신의 부모를 가진 일로나는 중년의 여장부/여걸로 파렴치한 동지들과 함께 항공사 여승무원으로 가장한 ‘직업여성’들을 고용해서 고객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사업을 구상한다. 가비에로는 그동안 금괴밀수, 무기수송 등 많은 위험천만한 일들을 해왔지만, ‘바빌로니아 여인들의 재주’를 이용한 이 사업만큼 스릴 넘치고 짭짤한 일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다만, 가비에로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역시나 비극적이기만 하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이야기인 <아름다운 죽음>에서 마크롤 가비에로는 라플라타 강과 탐보 산마루를 오가는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선다. 얀 판 브란덴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로부터 철로 건설계획을 제안받고 노새를 이용한 화물을 나르게 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험이 가비에로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어김없이 가비에로가 꿈꾸는 이상형으로 암파로 마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 시리즈에는 언제나 물이라는 이미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생명의 근원이자, 공간 이동을 위한 매개체로서 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가비에로의 방랑벽을 상징한다. 현재에 집착하지 않고, 전 세계를 상대로 맞짱을 뜬 방랑자 가비에로의 삶은 안정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가는 곳마다 꿈꾸는(아니 실제로 꿈일 수도 있다!) 여성과 염문을 뿌리는 그는 안식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방랑을 꿈꾸는 천상 뱃사람이다.

여성성에 대한 작가의 집착과 여성을 통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 역시 모험가 가비에로의 삶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작가의 모성에 대한 동경이 몽환적 이상형에 대한 끝없는 희구로 재현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주술적 리얼리즘 역시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에서 빠질 수가 없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티스가 쓰는 글의 공간적 배경은 모두 들어본 듯하면서도 생소하기만 하다. 실제로 세계를 주유한 무티스의 다양한 체험은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그리고 유럽을 아우른다. 그가 이야기하는 지명의 향연은 가히 뒤쫓아 가기가 버거울 정도다. 자신의 체험을 마치 보고 묘사하는 듯한 사실주의와 나폴레옹 제국시대 장교나 볼리비아 혁명의 영웅 볼리바르 혹은 수크레 제독 같이 실존했던 인물들의 등장으로 범벅된 주술적 리얼리즘은 실존과 판타지를 위태롭게 오가며 독자를 미혹한다.

천하의 방랑자 마크롤 가비에로의 삶을 읽으면서, 작가 알바로 무티스의 삶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고국인 콜롬비아에 산 세월보다 타지에 산 시간이 더 많은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에 배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한참 늦게 도착한 무티스의 글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주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 자체가 적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또 다른 라틴 아메리카 작가를 알아 가는 과정에 즐거움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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