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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절판된 책의 운명은 참 기구하기만 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칠레 출신의 망명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거의 대개의 책이 절판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우선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책들은 죄다 사고, 또 절판돼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은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면서 힘들게 구했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과 <귀향> 모두 그렇게 구했다. 하지만, 세풀베다의 또 다른 책인 <소외>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인근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게 됐다.
<소외>(Historias marginales)는 2000년에 나온 모두 35편의 길고 짧은 에세이들을 모은 수필집이다. 개인적으로 세풀베다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간결성이다. 그가 발표한 다른 소설들도 예외 없이 길지 않은 장편(掌篇) 스타일의 글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에 깊이가 없는 건 절대 아니다. 그의 글에는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조국 칠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절절한 세풀베다의 애끊는 심정이 투박하게 묻어 있다. 세풀베다는 정의에 대한 선동 같은 과격한 방법 대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그대로 글로 담담하게 풀어내기에 더 멋진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를 상대로 맞짱 뜬 세풀베다는 가장 먼저 독일의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이자 네덜란드 소녀 안네 프랑크가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베르겐 벨젠 수용소로 독자를 차분하게 안내한다. 수용소의 어느 돌멩이에 새겨진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절규가 새겨진 문구는 지난 세기 인류의 양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힌 일대 사건에 대해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강제한다. 뒤에 나오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레지스탕스 아브라함 슈츠케버와 나치의 만행을 자신의 존재로 입증해 보인 페데리코 아무개(프리츠 니만트)의 이야기들은 서로 공명하면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과거사를 조명해 준다.
한 때 그린피스 활동을 했던 작가는 지중해 고래 존재의 소중함에 대해, 독일에서 망명생활 중에 한 가족처럼 지냈던 소로바스의 죽음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면서 삶의 소중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기도 한다.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몸으로 맞선 이들의 영웅적인 모습과 혹한의 영지 라플란드 체험기, 아마존 마누 밀림이 가진 종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조국을 침략한 파시스트 군대에 대항해서 전투기를 직접 몰고 싸웠던 스탈린그라드의 백장미 여전사들과 사랑하는 애인을 잃고 엘살바도르의 정글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게릴라 여의사의 이야기에서도 역시 가슴 뭉클한 감동의 전이를 체험한다.
<소외>에는 이런 영웅적인 이야기 말고도,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시장통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정말 맛있는 파스타를 양껏 제공해준 아름다운 여인 로셀라 아주머니, <죽음만 빼고는 모두 해결 방법이 있다>라는 신조로 죽는 날까지 가난한 고객들의 수도관을 걱정한 마에스트로 코레아 그리고 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폐선장을 차려 배를 해체하는 미스터 심파 등 우리네 삶 가운데 있는 보통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역시 수필집 <소외>에서 압권은 바로 세풀베다의 조국 칠레의 암울했던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을 이겨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얼결에 꿀과 젖이 흐르는 땅 아메리카(미국)이 아니라, 고기를 무한정으로 먹을 수 있다는 라틴 아메리카에 둥지를 틀게 된 이방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형집행인’들로부터 모진 학대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콤파녜로(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불구가 되거나 혹은 자신의 귀중한 생명마저도 잃은 사람들, 오로지 진실을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아날리시스> 잡지를 발행한 세풀베다의 고집스러운 친구 후안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아픈 상처의 퍼즐을 세풀베다는 투덕투덕 이어 붙이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읽을 수가 있어서 루이스 세풀베다의 글을 사랑한다.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때로는 투박하고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 그의 글이 너무나 좋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세풀베다의 조국 칠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절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생명마저 초개같이 내던진 나의 영웅 살바도르 아옌데의 묘소를 언젠가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