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 폴 오스터의 책에 푹 빠져 버렸다. 어느 누가 올해 만난 최고의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다음의 세 명을 꼽을 것이다. 작고하신 커트 보네거트 할아버지, 칠레 출신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이 양반 책은 특히 짧아서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다양성 그 자체인 브루클린을 나와바리로 삼아 작품활동을 펼치는 폴 오스터가 그들이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폴 오스터의 책도 바로 다 읽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이 책은 파주에 내가 자주 들르는 이가고서점에서 보고서, 찜을 해둔 책이었는데 지난 주말 그동안 누가 사갔을 새랴 싶어서 바로 사서 단박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은 폴 오스터와 홍콩 출신의 감독 웨인 왕이 손을 잡고 만든 두 편의 영화 <스모크>와 <블루 인 더 페이스>의 제작과정과 시나리오가 담긴 책이다. 빡빡한 행간으로 유명한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이지만 그런 연유로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영화 <스모크>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보긴 했는데 세월과 망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잘 기억이 나지 않던 차에, 그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시절의 추억이 그야말로 마법처럼 기억 저 너머에서 피어올랐다. 책을 읽기 전에 단지 오랜 기억 속에서 ‘참 따뜻했던 영화였지’라는 나의 영화에 대한 단상은 꼼꼼하게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뉴욕타임스로부터 폴 오스터가 어느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단편소설을 하나 써달라는 청탁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오기는 브루클린의 가상의 담뱃가게에서 훔친 카메라로(!) 어느 특정한 시기에 매일같이 거리의 사진을 찍는다. 그는 지난 십여 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의식을 엄숙하게 진행해왔다. 오기가 일하는 이 담뱃가게는 브루클린에 서식하는 이웃들의 소통 공간이다.

우리네 그것과 다를 게 없는 소시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훈훈한 이야기들이 하비 카이틀과 윌리엄 허트라는 연기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두 명의 걸출한 배우들과 수많은 단역 배우들의 열정과 에너지와 결합이 돼서 <스모크>가 탄생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작가 폴 오스터의 시나리오 작업이 탄탄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혼자서 책을 쓰는 소설가의 그것과 수많은 사람이 기획과 제작 단계에 개입하게 되는 영화 작업은 그 근본에서부터 차이점을 보여준다. 영화 <스모크>의 후속편 격인 <블루 인 더 페이스>의 경우에는 촬영 기간이 단 6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얼마나 급하게 촬영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 바쁜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 때문에 때로는 따로따로 촬영을 해서 편집의 묘미를 살린 비하인드 스토리의 소개에서는 ‘아, 그랬었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래전에 친구가 그린 만화에서 모티프를 잡아서 어설픈 시나리오를 써 본 적이 있는데, 개개인의 세부적인 감정의 기술과 함께 상황설정 그리고 공간묘사 등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뛰어난 작가가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는 아니라는 공식마저도 폴 오스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나 보다. 대개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맡은 시나리오를 감독에게 넘겨 주면 자신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 <스모크>에서 폴 오스터는 촬영현장은 물론 편집과정에도 흔쾌히 참가를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덕분에 후속작 <블루 인 더 페이스>에서 웨인 왕 감독과 함께 크레딧에 공동감독의 타이틀을 올릴 수가 있었다.

<브루클린 풍자극>에 이은 두 번째 폴 오스터와의 만남 역시 흡족했다. 앞으로 계속될 폴 오스터 작품세계 탐험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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