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론 커리 주니어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가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캐릭터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번에 비채에서 출간된 미국 출신의 작가 론 커리의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의 주인공 존 티보도 주니어에게서 그런 점을 느꼈다. 아마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이 책에 아주 몰입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론 커리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고 한다. 아마 이 때 그는 자신이 미래에 쓸 소설의 소재들을 개발해낸게 아닐까? 책에는 자신의 고향 뉴잉글랜드의 곳곳의 지명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아마 그 동네에서 살아본 사람이 듣는다면 한 번에 척하고 알아들을만한 그런 이름들 말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장으로도 유명한 펜웨이 파크, 메인 주의 유명한 여름 휴양지 와일드 오처드, 스토로 드라이브가 그렇다.
책이 나오기 전에 공개된 첫 장을 보면 특이하게도 97이라는 숫자로 시작을 한다. 주인공 존 티보도 주니어의 삶의 첫 순간에서부터 시작되는 숫자, 독자들은 이 숫자의 카운트가 제로가 되는 순간 책이 끝나리라는 사실을 직각적으로 깨닫게 된다. 세계 파괴자가 그 어린 주니어에게 자신의 삶의 어느 순간에 우주에서 날아온 혜성이 지구를 끝장내리라는 계시를 알려 준다. 미래의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어린이, 소년 그리고 청년의 삶이 어떨까?
어떻게 보면 지구 종말이라는 조금은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작가 론 커리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끌어 담는다. 우선 주니어가 성장해 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은 성장소설의 틀을 빌려 온다. 개인적으로 주니어 못지않게, 정이 가는 캐릭터는 주니어의 형 로드니다. 어려서 삼촌네 집에 들렀다가 우연하게 배운 코카인에 중독이 되어 일상의 삶에서 어긋나 버린 로드니. 하지만 역시 어린 시절, 야구 천재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로부터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지만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지원을 해서 떠났던 아버지 존과는 달리 로드니는 결국 명문구단 시카고 컵스의 유격수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여전히 삶의 사소한 것들은 깜빡깜빡하는 피터 팬 같은 사나이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는 지구 종말을 알고 있는 주니어에게도 돌아온다. 론 커리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도, 로드니와 주니어의 아버지 존의 시각에서, 그리고 주니어는 물론이고 주니어의 평생 여자 친구 에이미의 시선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끌어낸다. 마치 정신분열증에 걸렸다고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주니어의 생각들처럼 쉴 새 없이 다양한 이야기들이 론 커리의 손끝에서 펼쳐진다. 작가는 누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 소설이란, 독자들로 하여금 결말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도그마를 철저하게 따른다.
성장소설에서 출발한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은 미스터리와 스릴러 심지어는 판타지 장르까지 섭렵한다. 때로는 감동으로, 또 때로는 비극으로 다가서는 작가의 이야기들에 흠뻑 빠지게 된다. 마치 어린이들을 상대로 인형극을 보여주는 인형술사처럼, 시공간에 구애 없이 자유자재로 그야말로 마술 같은 이야기들을 지어낸다. 특히, 3부의 “다중우주” 이야기는 정말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묘미란! 스포일러 때문에 더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야구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해서 더욱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왜 로드니를 레드삭스 선수가 아닌 시카고 컵스의 선수로 등장시켰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그 이유는 아마 레드삭스는 지난 2004년에 86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따라 다니던 저주를 마침내 풀고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여전히 1908년 이래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컵스를 안타깝게 여긴 작가의 아량 탓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관해서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355쪽에 보면 페넌트 레이스는 1년에 한 번 9월에 치러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1년에 그즈음해서 치러지는건 페넌트 레이스가 아니라 포스트시즌/플레이오프다. 페넌트 레이스는 정규시즌을 지칭하는 말로 4월부터 9월까지를 의미한다. 작가의 오기인지 아니면 번역 상의 실수인지 모르겠다.
역시 가족 간의 관계에 중심을 미국 출신의 작가답게 지구 종말, 파편화되어 가는 21세기 가족관계, 메이저리그 야구, 가난과 빈곤의 문제 그리고 환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책 속에 녹아들게 만들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가족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아버지 존이 폐암으로 죽어가게 되자, 만사를 제쳐 두고 먼발치에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노력하는 주니어의 모습과 아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완고한 아버지의 비애가 중첩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은 론 커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예 작가답지 않은 탄탄한 구성과 함께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소재들의 향연은 전혀 새내기답지 않은 모습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처음 보자마자 좋아하”(372쪽)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썼는데,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이 나에겐 그렇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