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아직 발자크의 책을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책을 읽다 보니 발자크의 이름을 곳곳에서 듣곤 하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단숨에 다 읽어 버린 김탁환 선생의 <노서아 가비>에서 다시 “소설노동자” 오노레 발자크의 이름과 만날 수가 있었다. 발자크는 김탁환 선생의 삶의 롤모델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지난 10년간 무려 40권을 책을 냈다는 다작 작가 김탁환 선생의 신작 <노서아 가비>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영화의 상영시간과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엇비슷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는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재밌고 잘 읽히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이번 가을 내가 모토로 삼은 “재밌는 책을 읽자”와도 어쩌면 그리도 궁합이 척척 맞는지.

머리가 아닌 손으로 글을 쓴다는 김탁환 선생은, 책을 쓰기 전에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체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실린 역관 김홍륙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삼아 이 멋들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선이 열강의 침입으로 국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역관 최홍의 딸이자 안나, 따냐 혹은 최월향으로 불리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역시 역관의 딸이기에, 어려서부터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 상황설정은 그녀가 장차 러시아를 무대로 해서 활약하게 되는데 있어 중요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중국 천자에게 조공하는 사신을 수행하러 갔던 아버지가 나랏물건을 가로채서 도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안이 결딴나면서 천민의 지위로 하락하게 된 따냐는 조국을 버리고 월경하게 된다. 대륙에서 전각기술을 배워 위조된 그림에 낙인을 찍고, 또 베드로의 도시라 불리는 러시아의 뻬쩨르부르그에 가서는 유럽 각국의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숲을 속여 팔아먹는 ‘얼음여우’ 사기단의 일원으로 맹활약을 하게 된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북구의 핀란드에서 남쪽의 안남(베트남)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 편의 액션활극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띠지에 보면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라는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아마 이렇게 극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이 앞으로 나올 영화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먼저 제목에 대해 말했던가? <노서아 가비>는 러시안 커피라는 뜻으로, 매 장마다 커피와 커피메이커, 그라인더와 찻잔 세트 등에 대한 일러스트들이 소개되고 있다. 커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주인공 따냐의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호사품으로, 따냐 역시 커피홀릭의 길을 걷게 되는데 위기의 고비에서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입신의 방편으로 커피는 그녀의 삶을 톺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따냐가 러시아 땅에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녀의 첫사랑인 이반. 이반 역시 조선 사람으로, 조국에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역만리 타지에서 사기단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따냐를 구해낸 이반은, 따냐와 운우지락을 나누면서도 연인이자 동료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개인적으로 그 넓고 광활한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해대는 이 두 남녀의 만남에 대해 소설적 개연성이 지나치게 개입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물론 재미라는 측면에서라면 그보다 더 극적일순 없겠지만.

이렇게 의기투합된 따냐와 이반은 갈범 무리라는 5인조 사기단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게 된다.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에 조선 특명전권대사로 초청된 민영환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조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와 배신의 칼바람 속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따냐는 자신이 떠났던 조국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의 러시아어 역관으로 변신한 이반과의 재회. 이반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주선으로 따냐는 역관의 딸에서, 전각 사기꾼 그리고 러시아 숲을 팔아먹던 사기단의 일원에서 이번에는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커피)를 만들어 올리는 바리스타로 인생유전을 이어간다.

한편 을미사변(1895년)으로 중전인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본 자객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따냐의 러시아에서의 활약상과 더불어 고종에게 커피를 지어 올리는 바리스타로서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소설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와 자신이 사랑한 이반, 김종식 그도 아닌 정도령과의 놀라운 관계에 대한 결말이 독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도저히 책에서 손을 떼게 하는 마력으로 다가온다.

<노서아 가비>는 확실히 재밌다. 사전에 미리 영화화를 구상하고 써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간결체의 짤막짤막한 대사 진행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긴 호흡보다는 짧은 호흡 덕분에 책읽는 재미가 배가되었다. 게다가 러시아 대륙을 누비며 유럽의 귀족들을 상대하는 당시 여성상과는 파격적인 따냐의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이 독서몰입에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를 잃고, 외세의 침탈에 시달린 고독한 군주 고종의 모습을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적으로 그려낸 김탁환 선생의 기발한 스토리텔링에 박수를 보낸다.

고종과 이완용과 같은 실존했던 인물들과 역관 김홍륙의 암살 시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빈 공간을 자신이 빚어낸 인물과 이야기들로 채워넣는 김탁환 선생의 탁월한 이야기 구성에 탄복해 마지않는다. 아마 이런 맛에 팩션(faction)을 읽는 거겠지? 이렇게 재밌는 소설과 만난 사실에 다시 한 번 마음이 넉넉해진다. 아, 그나저나 발자크의 책들은 과연 언제나 읽어 보게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