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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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자못 낯설다.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라, 책의 표지에는 항간에 떠도는 백가지 기묘한 이야기들이라고 적혀 있다. 작가는 일본 출신 교고쿠 나쓰히코, 괴담과 기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역시 무더운 여름날에는 오싹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기담집도 좋겠지 하는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아, 참 그전에 이 소설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애니메이션을 구해서 보기 시작했다. 다른 책읽기와는 다른 색다른 맛이 있었다. 우선 애니메이션을 한 편 보고 나서, 그에 해당하는 에피소들을 차례로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은 이야기의 비주얼화가 뛰어나서 나중에 책을 읽는데 있어서 아주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역시 25분 남짓한 애니메이션으로는 책이 주는 풍부한 상상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책의 완벽한 승리였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는 모두 해서 7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에도 교바시 출신의 괴담수집가 곰곰궁리 야마오카 모모스케, 부적팔이 어행사 마타이치, 미모의 인형술사 오긴 등의 캐릭터의 시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그들 캐릭터들의 정체가 좀 더 모호하게 묘사가 되면서 일본 전국을 떠돌면서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신군(神君)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에도 시대가 시대적 배경이다. 서구세계에서는 르네상스기를 거쳐 과학적 사고와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지만, 전국시대 이후의 일본은 여전히 귀신과 요괴 같은 신화적 요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교고쿠 나쓰히코는 탐욕과 질투 같은 인간 본연의 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파고든다. 첫 번째 에피소드 <아즈키아라이>(팥 씻김이)에서는 어느 상인의 후계자 살인에 관계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조금은 모자라지만 됫박의 팥 알갱이를 정확하게 맞춰내는 후계자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살해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다.

소설에서는 타고난 모사꾼이자 소악당이라고 일컬어지는 마타이치와 그의 일당이 의뢰를 받아 예의 범인을 응징한다. 그들의 응징은 복수의 의미를 뛰어 넘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자, 혹은 천륜을 거스르는 악당들을 상대로 한다. 글쟁이 모모스케는 항상 그들을 돕거나 하면서, 마지막 장에 가서 마타이치들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사건의 전개와 연유를 알려준다. 친절하시기도 하셔라.

매 에피소드마다 에도 시대 화가인 다케하라 슈운센의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하나씩 게재하고 있다. 위의 책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의 모티브가 된 괴담집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그림들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들에 대한 실마리라고나 할까.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씩이고,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가서 그 그림들을 살펴보곤 했었다.

개인적으로 사무라이 이야기들을 좋아해서 그런 진 몰라도 세 번째 에피소드인 <마이쿠비>(춤추는 목)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동네에서 만행을 일삼는 야수 같은 악당,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귀 그리고 썩어 빠진 관리를 한 방에 처리하는 마타이치들의 활약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론 여전히 신분제 사회에 얽매여 있던 일본의 시대상이 엿보이기도 했다.

작가의 서술 방법 중에서, 대화를 하는데 한 쪽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곧잘 등장을 한다. 아마 모모스케의 질문일텐데, 질문들은 모두 빠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대답만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독자들은 이야기꾼의 대답을 통해 묻는 이의 질문을 유추해 볼 수가 있는데 요런 아이디어는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맨 마지막 에피소드인 <가타비라가쓰지>에서는 삶과 아름다움의 무상함을 조금은 엽기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어느 사무라이의 비정상적인 애정행각이 옛 고사와 오버랩이 되는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항설백물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고른다면 어떤게 될까? 난 “신심”과 “인과응보”라는 낱말을 꼽고 싶다. 오만가지 잡신과 요괴들이 횡행하는 일본에 기이한 이야기들이 판을 치는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곳곳에서 신심을 강조하는 그네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다만 그 구체적 대상들은 살짝 빼놓은 채 말이다. 다음으로 인간답게 살라는 교훈이 배어있는 인과응보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마타이치들은 실천에 옮긴다. 물론 폭력적인 방법 대신 아주 교묘한 방법을 사용해서 말이다.

사실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놀랐지만 책을 읽다 보니 전혀 그런 볼륨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속도감과 캐릭터 묘사 그리고 집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이야기들은 참으로 정교하지 짝이 없다. 모모스케를 내세워,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빠져 들게 하는 기술부터 시작해서 끝에 가서 마타이치의 설명으로 매조지하는 기법이 여느 추리소설 버금가는 재미를 부여해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 책의 조속한 출간을 애타게 기다려 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도 어느새 교고쿠 나쓰히코의 팬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속항설백물어> 그리고 <후항설백물어>가 출간예정이라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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