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신화 - 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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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역시 신화의 기본 스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죽어라고 읽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서는 그 신화의 소스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작가가 누구인진 중요하지 않았다. 꽃말로부터 시작된 나의 신화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막 읽은 <그림 같은 신화>는 작가의 감성을 섞어 놓은 16개의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니 굳이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작가가 느끼는 대로 고전 그리스 신화에서 임의로 고른 16가지 이야기들에 자신의 감정과 해석들을 풀어 놓는다. 여느 책과 다른 점이라면, 예의 신화들을 소재로 한 명화들의 현시(顯示)라고나 할까.

책의 표지는 워터하우스가 그린 판도라가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해서 불씨를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 형제를 벌하기 위해, 신들이 만든 피조물인 판도라. 그녀의 아름다운 유혹을 마다하지 않을 거라는 신들의 계산은 적중했다. 물론 교활한 신들은 형이 아닌 보다 쉬운 상대인 에피메테우스를 골랐지만 말이다. 판도라의 결혼지참 선물로 보낸 예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들이 훨훨 날아가 버리고 희망만이 남았다고 했던가.

황경신 작가는 판도라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동지애적 연민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특히 메두사와 메데이아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을 위해 적극적인 변호에까지 나선다. 메두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자신을 유혹한 신이 아닌 자신에게 내린 형벌을 받는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신들의 판단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이 추가된다. 사랑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자신이 가진 마법과 거래하는 것만 배워온 메데이아는 사랑도 같은 방법으로 얻으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한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흑인 오르페>가 떠올랐다. 물론 배경은 브라질의 유명한 리우 카니발이지만, 신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 리라와 노래 명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짧은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내려간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장기인 음악으로 하데스를 설득시켜,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순간 하데스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패한다. 신화에 나오는 모든 터부(taboo)들은 깨지게 되어 있다. 판도라가 그랬고, 프시케가 그러지 않았던가.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소개된 그림 중에서 재밌는 건 17세기 롤란트 사버리가 그린 <오르페우스>에선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악기가 U자형 현악기인 리라나 키타라가 아닌 바이올린이라는 점이다. 신화의 시대적 반영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는 표현이었다. 21세기 오르페우스라면 전자 기타를 뜯고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 대해서 작가는 이기적 사랑의 전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아니 한술 더 떠서 비겁하다고까지도 한다. 피그말리온은 조각가라라는 말도 있고, 왕이라는 말도 있다. 여성에 대해 환멸을 느낀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조각인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남녀의 사랑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으로 치환이 되면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피그말리온(남자)에 대한 비난일까. 하지만 장 레옹 제롬이 그린 키스의 순간에서는 전혀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다만, 지고지순한 사랑의 순간만으로 기억이 될 뿐인데, 역시 한 가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보는 시선에 따라 백만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많이 봐온 워터하우스의 그림 뿐만 아니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라는 매력적인 화가를 알게 된게 큰 수확이었다. 그가 얻지 못해 안타까워한 사랑이었던 제인 모리스를 모델로 한게 분명한 몇몇 그림들과의 만남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작가는 조지프 캠벨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화의 원형적인 모습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윤리적이면서 초월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들의 모습에 가깝다. 우리 인간들처럼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모든 감정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지난 수천년 동안 신화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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