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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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 다이어트가 한창이다. 그래서 예전이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샀을 그런 책들도 신중(?)하게 구입하는 중이다. 클레어 키건의 국내 세 번째 소개 작품인 <푸른 들판을 걷다>도 중고서점에 나와서 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빡세게 다이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구매 대신 대출을 선택했다. 그동안 인기 책이어서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출간된 지 한 6개월 정도 지나니 드디어 대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당장 읽지는 않고, 열흘 정도 묵혀 두었다가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했다.

 

<푸른 들판을 걷다>에는 모두 7개의 단편 소설들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의 키워드는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가 아닐까 싶다. 첫 작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에게 끔찍한 성적 착취를 당하던 소녀가 아일랜드 집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어지럽히는군 그래. 오래 전 대학 동창이 가족이 원수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다. 뭐라고 할 말이 없네 그래.

 

표제작인 <푸른 들판을 걷다>의 주인공은 오늘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제다. 개신교의 목사와 달리 사제는 술을 마실 수 있었지. 사제님은 핫위스키를 주문해서 결혼식 분위기에 슬며시 녹아든다. 뭐랄까 아일랜드 사회에서 사제가 차지하는 일부분을 볼 수 있다고나 할까. 결혼식이 끝나고 푸른 들판을 거니는 꿈을 꾸는 사제님의 사적 비밀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건 사제님이 오늘 결혼식을 올리는 주인공 케이트 롤러의 옛 애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성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 신에 물었던 것일까.

 

서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그런 사제의 고민에 수긍하게 된다. 심지어 케이트는 사제에게 성직을 그만두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외딴 곳에서 마사지업을 하는 중국인을 찾아간다. 옛 연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자신만의 비밀을 묻어 두고 다시 본업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도 등장하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클레어 기건식 비판일까. 마침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책들도 만나고 있는 중이어서 그런지 비슷한 기류가 느껴지기도 했다.

 

클레어 키건의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삼림 감독원의 딸>도 흥미롭다. 서사의 시작은 아하울 농장주 빅터 디건과 그의 부인 마사 던의 기묘한 결혼에서 출발하던가. 세 아이의 아버지 디건에게 아하울 농장은 전부였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 마사는 달랐다.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녀는 돈을 모으고 있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아하울은 디건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한다. 지난 수년 동안 돈을 갚아 왔지만, 앞으로 5년 더 돈을 갚아야 비로서 융자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랑하는 딸 빅토리아의 생일날에도 누가 주인인 지도 모르는 리트리버를 데려다 선물로 안겨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트리버 '저지'는 주인이 따로 있는 개였다. 디건이 하는 짓마다 아내 마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관계가 이 정도로 악화가 되었다면 서로의 행복을 위해 갈라서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소문난 이야기꾼이 마사는 어느 날,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가만 듣자 보니, 이건 빅터와 마사 부부의 이야기가 아닌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던 빅터는 농장일을 핑계로 밖으로 나와 버린다. 자 이렇게 파탄난 디건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숙명은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는 속죄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의 화재가 아니었을까. 막내딸 빅토리아의 출생의 비밀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물가 가까이>에서는 케임브리지(처음에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인 줄 알았다)에서 텍사스에서 21번째 생일 파티를 치르기 위해 텍사스로 온 청년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이혼하고 리조트 재벌 백만장자와 결혼한 어머니는 주인공을 위해 그럴싸한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주인공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번잡스럽고 귀찮을 따름이다. 백만장자 계부의 언행은 또 어떠한가. 아마 클린턴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정치 이야기로 아슬아슬한 자리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신공을 계부는 보여준다.

 

나라도 편향된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머니의 체면을 봐서 청년은 꾹 참고 곤혹스러운 순간들을 집어 삼킨다. 나중에 먼 바다에 수영을 하러 나갔다가 익사할 뻔한 위기도 겪게 된다. 이래서 어른들이 술 마시고 절대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던가. 결국 주인공은 케임브리지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하기 위해 전화를 들지만, 예약 담당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맨 마지막에 배치된 <퀴큰 나무 숲의 밤>도 만만치 않다. 죽은 사제를 사랑한 여인 마거릿 플라스크와 이웃에 사는 49세 노총각 스택은 결국 정분이 나고야 만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일들은 그렇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클레어 키건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들이나 수녀들은 하나 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걸까. 아일랜드라는 특수성을 빼놓을 수가 없지 않나 싶다.

 

정령과 신화의 나라 그것도 '클레어' 출신의 마거릿은 마담 놀란을 만나고 나서 더나고어의 이른바 '마녀'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거릿을 찾아와 상담하고 아픈 곳을 고치기 시작한다. 심지어 신부님까지도. 첫 아이를 영아돌연사로 잃고 상심해 있던 마거릿을 스택과 동침하고 그의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어느날 아들 마이클과 함께 스택의 곁을 떠나게 된다. 그것도 마치 이미 정해져 있던 일처럼 물 흐르듯 전개되고, 스택도 이 모든 상황들을 잠자코 받아들인다. 이건 마치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남겨 두고 어제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라스트 스퍼트를 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푸른 들판을 걷다>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4월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독서였는데, 이번에도 이전에 읽은 클레어 키건 작가의 책들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그런 독서가 아니었나 싶다.

 

클레어 키건의 시선을 통해 왠지 모르게 타인의 은근한 비밀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비밀들은 아예 알고 싶지 않은 그런 수준의 그런 비밀들도 있고, 또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를 지니고 사는 타인의 삶의 양식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회를 주었다고나 할까. 난 여전히 이런 문학적 낯섬에 끌리는 모양이다. 내가 계속해서 책에 매달리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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