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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순례자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관내 도서관에 2권이 있다고 해서 먼저 빌려 보려고 했는데, 내 차례가 도통 오지 않는다. 그래서 과감하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권 <고행의 순례자>를 사서 읽었다. 이 이미지는 AI가 만들어 주었는데, 십자군 전사 출신이라 좀 더 우락부락한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거의 교황 수준이 아닌가 싶다.
1편이 1137년 그리고 10권은 4년 후인 1141년경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시리즈 가운데, 이 책을 고른 이유 중의 하나가 성녀 위니프리드에 대한 연작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다. 캐드펠 수사와 몇몇 사람만 아는 것처럼,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이장된 성녀의 관에는 다른 이의 시신이 들어 있다. 그래도 많은 신자들이 그 실체를 모른 채, 기적와 이사를 바라는 마음에 오늘도 성녀를 기념하고 순례의 길을 나선다.
어쩌면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위한 포석을 준비한 지도 모르겠다. 중세에 성인들의 유골이 가지는 의미는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1편에서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직접 나서서 슈루즈베리 수도원에 신도들과 자금을 모을 수 있는 성유골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던가.
<고행의 순례자> 초반에 당시 잉글랜드의 복잡한 정치상황이 소개된다.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사실 이 부분은 좀 따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중세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좀 읽기가 버거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아, 진중한 독서에 대한 나의 열정이 이렇게 식어 버렸단 말인가. 귀차니즘이 폭발한 모양이다.
어쨌든 왕위 계승권이 놓고 모드 황후와 스티븐 왕/마틸다 왕비가 내전에 가까운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 주교의 지원을 받은 모드 황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양측의 협상을 위해 협의회에서 모드 황후를 공공연하게 반대했던 마틸다 왕비 편의 크리스천이라는 성직자를 자객이 습격했고, 그를 보호하기 사투를 벌이던 황후 측 로랑스 당제의 가신 라이날드 보사르가 죽고 말았다. 엘리스 피터스는 12세기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위니프리드 속편을 개시한다.
나는 이번 <고행의 순례자>편에서 전반적인 스토리보다는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가에 중점을 두면서 책을 읽었다. 전직 십자군 전사 출신의 주인공 캐드펠 수사가 종교계를 대표한다면, 그의 동지로 등장하는 행정 장관 휴 베링어는 지역 책임자로 캐드펠과 합을 맞춘다. 지역 책임자로 휴야말로, 공권력이 필요할 경우 캐드펠 수사를 지원할 수 있는 적임자다.
성녀 위니프리드 축일을 앞두고, 기적과 이사를 염원하는 이들이 각처에서 몰려들면서 이야기는 굴러 가기 시작한다. 흐륀 같이 장애가 있는 십대 소년에게 성녀 위니프리드의 기적은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아니던가. 또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상처투성이 맨발로 고행에 나선 키아란 그리고 그를 옆에서 조력하는 매슈 같은 청년들도 등장한다. 물론, 시미언 포어 같이 순례자들을 상대로 한탕을 노리던 부랑배들도 빠질 수 없다.
순례자를 상대로 한 절도사건이 벌어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시미언 패거리의 소행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순례길의 인연으로 흐륀의 누이인 멜랑에흘은 키아란의 조력자 매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둘 사이를 눈치 챈 키아란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흐륀의 기적으로 슈루즈베리 수도원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멜랑에흘의 눈에 띄게 된다.
한편, 황후 로랑스 당제의 가신 올리비에 드 브르타뉴는 뤼크 메버렐이라는 청년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슈루즈베리에 도착한다. 뤼크 메버렐은 기사 보사르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니프리드 순례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한 모양이다. 그전 시리즈를 읽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캐드펠 수사와 메시르 올리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소설에 다양한 캐릭터들을 투입시키고 또 동시에 복잡한 잉글랜드 국내 정치 상황까지 다뤄야 하는 어려운 미션을 엘리스 피터스 작가는 멋지게 해결해냈다. 1편에서는 캐드펠 수사가 전면에 나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면, 주인공이 이제 노년에 접어든 만큼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면서 이야기를 몰고 간다. 물론 나중에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뤼크 메버렐을 추격하기 위해 수도원장의 재가를 받아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주 바람직하게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 캐드펠 수사들 앞에, 런던에서 상대방을 포용할 줄 모르던 모드 황후가 시민들의 쿠데타로 실권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메시르 올리비에가 스티븐 왕의 편에 서 있던 휴 베링어를 설득했던 것처럼, 이제는 입장이 역전된 올리비에를 휴가 설득하지만 강단 있는 기사 올리비에는 그의 제안을 마다하고 말에 올라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엔딩에서는 캐드펠 수사의 놀라운 비밀이 밝혀진다.
기적적으로 장애가 나은 흐륀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작가는 마냥 소설적 재미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본질에도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 않나 싶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이성에 기초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캐드펠 수사의 성심 어린 치료와 마사지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지만, 단기간에 그런 목발을 짚던 소년이 스스로 걷게 된다는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설정이야말로 소설을 다채롭게 만드는 그런 요소 중의 하나다.
소설의 중반은 좀 지루한 맛이 없었지만, 엔딩으로 갈수록 서사는 힘을 얻고 그리고 작가가 준비한 엔딩의 결정타가 터지면서 역시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10편이나 되는 장편 시리즈가 되다보면 매너리즘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엘리스 피터스는 시리즈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런 기발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지 않았나 싶다. 역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