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는 달 - 환색에도력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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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코앞이다. 오늘 달을 보니 아주 둥그렇더라. 골치 아픈 일 대신, 명절에는 그저 재밌는 책이 최고라는 생각이다. 연휴 기간 내내 그렇게 책만 읽으면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우리네 인생의 묘미가 아닌가.

 

나의 이번 명절 픽은 바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월드 제 2> 시리즈다. 신간 <청과 부동명왕>을 필두로 해서 착착 읽는 중이다. 오늘은 <신이 없는 달>을 읽었다. 이게 워낙 재밌다 보니 작심하고 읽는다면 하루에 한 권 정도는 너끈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을수록 가속이 붙는다고 해야 할까.

 

오치카/도미지로가 청자로 등장하는 미시마야 흑백의 방과는 다른 결의 작품이 바로 <신이 없는 달>이다. 19세기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 에도 마치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에도 마치에 사는 장삼이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조닌(소상인과 직인)들이 주를 이룬다. 최고위 계급인 사무라이들은 아마 미미 여사가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저자는 방점을 찍는다.

 

<신이 없는 달>에는 모두 12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초반에 배치된 <붉은 구슬>이다.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집권한 1841, 에도 막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했다. 막부의 실권자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나서서 폐정개혁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 바로 <붉은 구슬>의 단초가 되는 사치금지령이었다. 물가 앙등을 잡기 위해,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금지하고 강력한 처벌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세공전문가 사키치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발휘해서, 몸이 아픈 아내 오미요를 봉양해야 하는데 그만 밥줄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어느 무사가 나타나서 비밀리에 이번에 시집가는 딸에게 줄 은비녀 제작을 의뢰한다. 순간, 사키치는 나이든 무사가 막부의 공작원이 아닐까 의심해 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명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명품 비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호기를 과시한다. 물론 이런 호기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순간의 판단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인간사의 아주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그렇다면 이런 탄압의 시대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걸 미미 여사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서, 미미 여사가 쓰는 미야베월드가 어느 시절을 배경으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대략 19세기 중반, 전근대 시절 정도가 되겠다.

 

조실부모하고 친족에게마저 내침을 당했지만, 어려서부터 소방수의 꿈을 꾸던 청년 분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비록 지금 가게의 사환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에도 마치를 언제라도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화마로부터 구해내는 멋진 사다리 소방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미래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를 얻어 소방대에 발탁되지만, 정작 화재 현장에 투입되자 겁이 나서 그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렇게 번민의 나날이 계속되자 주인장 가쿠조가 자신 역시 분지와 같은 번민의 시절을 보낸 소방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길상물인 다루마 고양이 두건의 비밀을 슬쩍 알려준다. 진짜 고양이 껍질로 만들었다는 두건을 착용하면, 화재 현장에서 마치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변신해서 진짜 소방대원처럼 모든 걸 한 눈에 척 알아보는 그런 히어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다루마 고양이 두건을 차고 현장 출동한 분지의 활약을 대단했다. 문제는 다루마 고양이가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착용하는 자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뭐 이 정도는 괴담에서 기본 탑재가 아니던가. 결국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가쿠조가 분지에게 말한 것처럼 나 자신으로부터 도주하지 말라는 경고는 새겨들을 법하다.

 

<얼굴 바라기>는 외모도 자산이라는 현대 사회에 주는 일침이 아닌가 싶다. 박색의 주인공 오노부에게 동네 최고의 미남자 시게타로가 중매쟁이를 통해 청혼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마구 굴러가기 시작한다. 도대체 시게타로가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당사자는 마냥 오노부가 사랑스러운 모양이다. 이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한 오노부는 시게타로를 한 방에 때려 뉘여 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을 알고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천하절색인 시게타로의 누이들인 오스즈와 오린이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언니처럼 자신들도 예뻤으면 하는 말에, 오노부는 다시 한 번 분기탱천한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나 하고 말이지. 뭐에 쓰이지 않고서야 도저히... 아 그리고 보니 이 시리즈가 원래 요괴가 등장하는 괴담 시리즈였지. 그렇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강력한 원한이 실린 저주에 걸려 시게타로-오스즈-오린 모두 스스로의 외모를 비하하고, 반대의 이미지를 사랑해 버리게 된 것이다. 이게 무슨 우스운 비극이란 말인가.

 

이 모든 사단의 주범 오쿠메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오노부는 고민에 빠져 버린다. 오쿠메의 원한을 풀어 준다면, 시게타로들이 자신을 내쫓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인생 최대의 고민 말이다. 하지만 헌헌장부 스타일의 오노부가 양심을 팔아먹지 않고 결국 오쿠메의 소원대로 그녀의 원한을 풀어준다. 하지만, 오노부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오노부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그러니까 무언가 일이 꼬였을 때는 억지로 일을 풀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처리하라는 미미 여사의 말씀이다.

 

<붉은 구슬>에도 슬픈 복수극이 등장하지만, 맨 마지막에 배치된 <종이 눈보라>의 복수극도 만만치 않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여의고, 고리대업자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주인공 긴의 어머니는 오빠와 긴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긴은 이즈쓰야에 위장취업해서 3년간의 고생을 뒤로 하고 악덕 고리대 사채업자를 처단한다.

 

사실 긴이 이즈쓰야의 주인 내외가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그녀는 복수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궁지에 몰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에 복수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비명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서방정토 행을 기리며, 이즈쓰야 지붕에 올라 주인 내외가 그동안 모아온 차용증서를 가위질로 눈발처럼 날리게 만드는 장면은 통쾌했다. 문득 비질란테가 떠오르기도 했다.

 

神無月, 그러니까 신이 없는 달을 의미하는 표제작 역시 일품이다. 신이 자리를 비운다는 10월만 되면 강도질에 나선다는 성실한 어느 강도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그 강도를 너무 잡고 싶어 하는 오캇피키와 주점 주인장의 이야기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강도질에 나설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 거의 완전범죄에 가까운 강도질을 하는 범인은 지난 8년 동안, 아주 양심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왔다. 많지도 않은 돈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터는 것이다.

 

오캇피키는 마지막 범죄에서 범인이 강도상해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주인장은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크게 한탕을 벌일 거라고 예언한다. 노련한 범인이 현장에 유일하게 남긴 단서는 팥이다. 오캇피키와 주인장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범인의 직업을 추리해낸다. 병든 딸을 재우고 목표물을 향해 출발하는 범인과 그 범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오캇피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미시마야 시리즈와 다른 풍미가 담긴 이야기들이 <신이 없는 달>에는 넘실거린다. 미시마야에는 뭐랄까 좀 더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이번에는 보다 하위 버전의 간단한 이야기들의 행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전자는 전자대로 그리고 후자는 후자대로의 맛이 있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는 미미 여사를 역시 응원한다. 앞으로 건강하셔서, 계획한 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무사히 미야베월드 제2막을 완성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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