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아침의 책들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한뼘책방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 가서 빌릴 적에는 미처 몰랐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5년 전에 나온 책인데 절판되었다. 그러니까 살 수도 없는 그런 책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연히 알게 된 스가 아쓰코 여사가 구사하는 잔잔바리 이야기들에 빠져 생전에 5권을 발표했다는 스가 여사의 책들을 섭렵 중이다. 아마 최근에 나온 <트리에스테>까지 끝낸다면 내 마음대로 선정한 이달의 작가로 불러도 될 듯 싶다. 갑자기 의기충천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스가 여사는 평생 책과 더불어 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상인 출신 아버지는 이미 1930년대 유럽 여행을 할 정도의 댄디한 그런 메이지 남자였다. 그리고 훗날 유럽의 파리와 로마로 유학길에 오르는 딸에게 자신이 갔었던 곳을 가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바람난 아버지의 전적 때문인지, 딸은 아버지와 계속해서 불화를 거듭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리 오가이의 사전을 읽어 보라는 아버지가 알고 보니 독서 고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작가는 가감 없이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족이란 애증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책 역시 참 무서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내가 샀었던가. 아니면 산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그리스의 걸출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자니, 기억은 자의적으로 왜곡되고 수정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택쥐페리와 <어린 왕자> 편에서는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 나선 작가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공중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놀라운 시선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스가 여사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해지는지 모르겠다. 근로봉사로 학교 공장에서 혹시 연합군을 상대할 총탄을 만들었던 건 아닐까라는 그런 마음들 말이다. 좀 화끈하게 반성하면 안될까.

 

그런 면에서는 뒷부분에서 일본 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개스라이팅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해서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도 백장미단 같은 저항운동이 존재했지만, 나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어떤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신이 한참 공부하던 시인의 저작을 보고 전율했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리고 보니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책들이 죄다 종서에다가 왠 놈의 한자가 그리 많은지 난 옥편을 찾아가면서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김찬삼 씨의 세계일주기를 더듬더듬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오토바이를 끌고 나선 저자의 세계여행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막상 내가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 다만 파리에 처음 갔을 적에, 버스 안에서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할 때의 그 두근거림이란.

 

대학 시절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주인공 카타리나 베닌카사에 대한 전기를 읽고 나중에 시에나에 갔을 적에, 카타리나의 연고지를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인물과 공간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연결시키는 글쓰기야말로, 모든 에세이 작가들이 추구하는 로망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스가 여사의 글쓰기는 고수다운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말 그동안 있는 지도 몰랐던 클로드 모르강 작가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라는 책은 스가 여사의 소개로 알게 됐다. 다행히 국내에도 소개된 책이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이와나미문고 시리즈로 소개된 모양이다. 그리고 일본 군부가 시키는 대로 맹종한 자신들의 빈곤한 정신에 대해 반성하는 장면을 읽고 조금은 스가 여사와 화해했다고나 할까. 인간답게 살기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 도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아 당장 중고책방에 달려가서 사다가 도대체 어떤 책인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다.

 

집 근처 창업센터인가에 미미 여사의 <신이 없는 달>과 이 책 두 권을 들고 가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선선하니 책읽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낮인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여름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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