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쓰레기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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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하다. 우리 역사에 뛰어든 어느 중국 병사의 이야기를, 중국 출신 작가가 영어로 쓴 글을 읽는다는 건 말이다. 거기에 다시 한 번 우리말 번역이 추가됐다. 하진 선생의 <전쟁 쓰레기>는 반세기 전 우리나라를 반으로 쪼개 놓은 한국전의 무대를 그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대륙을 탈취한 중국공산당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고사를 연상시키면서 한국에 출병했다. 소설에서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중국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에 파견된 쓰촨 출신의 유유안이 주인공이다. 지금은 인민해방군 소속이지만, 쑨원이 세우고 장제스가 교장을 맡았던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공산주의 신봉자는 아니다. 지식인답게 유안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패퇴한 이유를 냉정하게 판단한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가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겠는가.

 

유엔군의 북진으로 패망 위기에 몰린 북한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했지만, 사실은 전선이 만주까지 확대될지 모른다는 상황 판단으로 한국 땅에서 그들을 저지하자는 속셈이었다. 참전 초기 중국의용군은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하지만, 화력과 보급물자에서 미군에 뒤져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유안은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미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유안의 영어 실력은 열악한 포로수용소에서 그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차례에 걸친 수술 끝에 부상에서 회복된 유안은 거제도 수용소로 이감된다. 거제도에서 그는 본토송환을 거부하는 국민당 애호자들과 강력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광신적 공산당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유안은 그저 홀로 되신 어머니와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에게 중국을 둘로 나눈 이데올로기 투쟁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용소 내 생활을 통해 유안은 장교나 사병이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그룹에 호감을 느끼면서도, 국민당 애호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쫓겨난 장제스가 지배하는 타이완으로 갈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포로들이 본토로 돌아가 봐야 호된 자아비판을 받고, “전쟁 쓰레기취급을 받을 거라는 예언을 한다. 이 부분에서는 예전부터 일본 군대에서 이런 풍토가 있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거제도 폭동과 제주도에서 포로생활을 통해 유안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그들은 당과 조직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수용소 내 폭동 같은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고작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하기 위해 그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 청년 장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저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 장기판의 말처럼 움직여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엄혹한 현실에 좌절한다. 운명의 갈림길마다 유안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급박한 선택에 내몰린다.

 

하진 선생은 전쟁이라는 개인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내몰린 한 청년의 운명을 <전쟁 쓰레기>를 통해 예리하게 파헤친다. 작가는 수용소에 갇힌 전쟁포로를 죄수라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전쟁터에서 순교자로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으로 다가온다. 인간 존엄성은 물론이고, 생존에 필요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담담하게 증언한다. 하지만, 전쟁포로들이 정말 두려웠던 건 불투명한 자신들의 미래였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토나 타이완으로 보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그들의 감정적 균형을 무너뜨렸다.

 

거제도 폭동에서 전쟁포로들은 미국의 제네바 협약 준수를 요구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의 정부나 북한이 해당 협약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이 지급하는 물자를 거부하면서, 조국이 자신들에게 충분한 보급품을 보내줄 거라는 환상마저 품고 있었다.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전쟁포로들이 얼마나 현실에 대해 무지했는지 하진 작가는 고발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유세계를 상징하는 국민당 정권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부패한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대륙에서 패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테니까 말이다.

 

개인의 모든 행동이 감시되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미연의 공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유안이 자신의 영어 실력을 향상을 위한 교재로 성경을 사용했을 뿐인데도, 유물론자의 눈에는 혹독한 자아비판 대상거리가 된다.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이면에는 다른 동기가 있었고, 그 때문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했다. 유안은 그저 구속받지 않는 삶을 열망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유안은 거제도 수용소에서 국민당 간부가 말한 대로, 공산당이 아군보다 적에게 관대할 거라는 숙명적 예언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반공주의자의 눈에 <전쟁 쓰레기>는 정말 훌륭한 반공 교재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하진 선생의 시선은 이데올로기보다 반전이라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공산주의자들만큼이나 국민당 애호자들 역시 자신의 신념 앞에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유안의 눈에 전쟁은 군인들의 시체를 연료로 삼는 거대한 용광로로 비칠 뿐이다(120). 실제 전장이 아닌 후방의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필요한지 이보다 더 좋은 증언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진 선생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충실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외국 출신 작가에게 배타적인 미국 문단에서 인정받은 하진 선생은 이 작품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 도전에 나섰다. 아쉽게도 <전쟁 쓰레기>는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에 고배를 마셨다. 작가가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해학과 풍자 대신 선택한 진중한 주제는 새롭게 진화한 하진 선생의 작품세계의 이정표가 되었다. 궁금해서 하진 작가 책 국내출간을 검색해 보니 10년 전이 마지막이다. 하진 작가는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걸까.

 

[뱀다리] 2007<자유로운 삶> 이래 다섯 편의 소설이 더 발표됐는데, 국내 출간은 멈추어 섰다. 한동안 하진 선생의 팬으로 그의 모든 책들을 구해서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쉽다. 특히 2011년에 발표된 <난징 레퀴엠>은 왜 출간이 되지 않는지.

 

[뱀다리2] 어제 우연히 역전다방 유튜바에서 장진호 전투 관련 내용을 보다가, 문득 하진 선생의 이 책 <전쟁 쓰레기> 생각이 났다. 리뷰는 13년 전에 쓴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이 읽어 보고 싶어졌다. 물론 책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새로 사서 읽어봐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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