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 삼국간섭과 갑오개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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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도서관 열람 차례가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먼저 볼 수 있는 책부터 읽다 보니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나머지 그리고 갑오개혁 편이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런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한중일 삼국의 근대사를 다루는 방대한 작업에 도전한 작가와 그리고 그 작가를 꾸준하게 후원하는 출판사의 역량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쨕쨕쨕.

 

전편에서 1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청일전쟁의 발발 과정을 살펴봤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전쟁의 페이즈 2를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몰려갔다. 일본군과 경군이 부재한 사이, 호남 일대는 동학군이 휩쓸어 버렸다. 집강소를 중심으로 해서 폐정개혁안이 실시됐다. 특히 남원의 접주 김개남은 래디컬리스트답게 개혁안 중에서 최고봉인 신분제 철폐에 주력했던 모양이다. 조선 오백년 반상질서를 무너뜨리는 그의 기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서울의 흥선대원군은 친일 갑오파정권에 대항해서 동학군에게 밀지를 보내 내응하는 전략을 세운다. 과연 노회한 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번번히 대항하는 아들 대신, 손자인 이준용을 군주로 삼아 다시 한 번 화려하게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권력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보니 민씨 척족만큼이나 흥선대원군 역시 조선 국가 몰락에 책임이 있는 인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동안 미적대전 북접의 승인을 받아 다시 한 번 두 번째 동학농민운동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삼례에 집결해서 위력을 과시한 동학군은 자신들을 토벌하러 나선 경군과 일본군과 대항하기 위해 공주 진격에 나선다. 스스로 십만 군세라고 했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어쨌든 경군보다는 인적으로 우세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일본은 주력 부대가 모두 만주로 진공한 상태에서, 본국에 있던 예비대대를 동원해서 조선 경군 지원에 나선다.

 

그리고 189412월 공주 우금치에서 맞붙은 동학군과 토벌군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경군/일본군에게 동학군 주력부대가 갈려 나가면서 전국을 호령하던 녹두장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리고 관군에게 추격당하던 동학당의 전봉준 위하 접주들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김개남은 잡힌 뒤 바로 사형당했고, 나머지 동학당의 리더들은 형식적 재판과정을 거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근왕척왜 슬로건을 걸고 사회개혁에 나선 동학혁명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엔딩은 초라했다. 여러 요건의 미비로 처음부터 봉건질서 타파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조정에서 이후 거의 평정된 동학운동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약속했지만, 동학운동이 보여준 기존 사회 질서 유린에 기겁한 민보군을 필두로 한 기득권층은 동학이라면 아주 치를 떨면서 잔혹한 사적 제재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화형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청일전쟁의 남은 이야기다. 이미 조선에서 청군에게 대승한 일본군은 천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세로 압록강을 넘어 만주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속한 전쟁의 종결을 바라지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전선을 넓혀 이후의 종전/평화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게 일본 전쟁지도부의 목적이었다.

 

다된 밥에 숟가락을 얹기 위해 등장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삽질로 동계작전에서 전사자의 열배에 달하는 병사자가 등장한 건 10년 뒤에 벌어질 러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일본군은 요동의 요충지 하이청과 요동반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저우-다롄 그리고 뤼순항을 잇달아 함락시킨다. 이런 기세라면 텐진과 베이징까지도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훗날 일본군의 잔악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뤼순 대학살로 상승군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가버렸다.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홍장이 애써 기른 북양함대를 박살낸 건 천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던 청나라는 결국 러시아를 동원해서(비밀협약을 맺은 뒤) 종전협상을 개시한다. 일본은 전쟁의 목적이었던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 지위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보호국으로 삼아 버리고, 2억냥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 그리고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이라는 두둑한 보상을 얻는다. 그나마 종전협상을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전권대신 이홍장의 암살 시도가 없었다면 그 이상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굽시니스트 작가가 이 지점에서 지적해 주는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선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부국강병을 국가의 모토로 삼아 시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교육에 나섰다. 현대식 학제 개편과 교육 제도 도입으로 농민들을 미래의 병사들로 양성하는데 성공했고, 청일전쟁으로 그 덕을 톡톡히 볼 수가 있었다. 일본 국왕에 충성하고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이른바 황군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조선과 중국 더 나아가 남방전선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막대한 전쟁 특수는 애초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자유당과 번벌 메이지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민들까지 정부 편을 들게 만들었다. 아니 전쟁이 이렇게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단 말인가? 원래 전쟁 목표였던 조선에서의 우월한 지위의 확보는 물론이고 새로운 광활한 영토와 일본 국가 재정의 몇 년 치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으로 열도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탕이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뜯어낸 전쟁배상금을 종자돈 삼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됐다.

 

다음 단계는 저자가 트리플 겐세이라고 명명한 삼국간섭이다. 노회한 정객 이홍장은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기에 앞서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아마 요동 반도 할양을 대비한 것이었을까. 서구 열강이 노리고 있던 중국에서의 이권을 매개로 삼아, 극동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던 러시아를 추동해서 독일과 프랑스까지 파트너 삼아 일본으로 여금 요동 반도를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서구 열강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일본의 부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파이를 많이 먹을수록 자신들이 먹을 게 줄어드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훗날 태평양전쟁의 서전이 되는 중일전쟁에서도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은 일관되게 중국 편을 들었다. 내가 먹지 못할 바에야, 다른 놈들도 안된다는 생각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18947, 경복궁 폴런(fallen)으로 시작된 갑오경장 역시 한계가 뚜렷한 개혁 시도였다. 친일파 내각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나마 어윤중이 탁지부에서 세금 징수를 일원화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보호국의 된 마당에,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 와중에도 갑오파, 갑신파 그리고 정동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군주 고종이 조선조 내내 비장의 무기였던 환국 키워드를 사용해서, 박박 정권의 박영효를 실각시키자 일본에서는 드디어 미우라 고로 특명전권공사를 기용해서 이른바 여우사냥에 나선다.

 

역시 이번에도 격동의 구한말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좌절, 요동반도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꺾인 트리플 겐세이의 실상(러시아의 외교적 승전보), 청일전쟁을 통한 군국주의 국가 일본의 탄생의 과정 정도가 본격 한중일 세계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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