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시그널
브리스 포르톨라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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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알게 되었을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어제 도서관에서 구해서 읽었다는 점이 중요할 뿐.

 

<노 시그널>에는 글보다 사진이 더 많다. 두께와 무게가 상당하다. 가방에 담아서 차까지 운반하는데 좀 무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안이 왔는지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데, 글자로 작다. 에잇!

 

전 세계의 오지에서 사는 10명의 사람들의 생활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이라는 방식의 이미는 예나 지금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떤 컷들은 만 마디의 말이다 글보다도 더 위력적일 수 있다. 사진이 품은 즉시성 그리고 리얼리티의 힘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현장에서 직접 본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작위성 역시 피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연출 말이다. 연출된 사진이 마냥 피사체를 따라 다니며, 원하는 컷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셔터를 누르는 것보다는 훨씬 덜 품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진작가들이 연출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또 서설이 언제나처럼 길었다. <노 시그널>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주제로 잡은 자연주의 혹은 생태주의보다 작가가 인터뷰한 대상의 국적이 더 궁금해졌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대부분은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말을 너무 사랑해서 아르헨티나에서 여성 가우초로 활동하는 스카이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모국어가 영어란 말씀이지. 몽골에서 반야생생활을 하며 순록을 치는 자야도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단 작가는 인터뷰 대상자들과 영어라는 매개로 대화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아 그리고 보니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었네.

 

브리스 포르톨라노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서 영감을 얻어 5년간의 프로젝트로 세계를 누비며 이 장대한 책을 완성했다. 1초라도 핸드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현대인들에게 전기와 인터넷,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살라고 한다면 누가 좋다고 할까 싶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세상의 온갖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그런 이들이 있다고 하니 놀랄 노자다.

 

작가는 평범하지 않은 삶의 양태를 구사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 보고 이들처럼 살라고? 사실 그건 가능하지 않다.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시장이나 마트 혹은 편의점에 가서 사는 우리가 자연에서 그런 것들을 얻는다는 건 이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 종말의 시대가 닥친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극한의 오지나 혹은 강추위를 무릅쓰고 순록을 치고, 85마리 허스키 개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아마 우리처럼 보통의 도시적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적어도 이 정도의 서사는 보유하고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언어와 자급자족 다음으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결정들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의 이러저러한 번잡한 생활에 염증을 낸 이들이 자신이 자유롭게 살 공간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유타에 사는 벤의 경우를 보자. 채소는 자신이 직접 재배해 먹고, 고기는 1년치 사냥을 해서 구한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주로 총으로 사냥을 하다가 지금은 좀 더 사냥 친화적(?)인 활을 사용한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인별그램으로 사냥하는 동영상을 자주 보고 있는데, 스포츠 같은 사냥과 달리 벤의 경우에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일상에서 일용할 고기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 사냥을 위해 자신의 체력단련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산에서 1년 동안 먹을 고기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가장은 오늘도 광활한 산림을 누빈다. 그런 그가 그전에는 비건이었다는 점도 비밀이 아니다.

 

알래스카에서 굴 양식을 하느라 등허리가 쉴 틈이 없다는 제리의 이야기 재밌게 다가온다. 미시건인가 어디서 부동산업을 하다가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부동산업을 털고 알래스카에 건너와서 굴 양식업을 시작했다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지금은 베테랑 업자가 다 되었다. 그리고 보니 서양에서는 참 이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사는 이들이 많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에세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나 작가가 마냥 자연주의/생태주의 삶에 대한 찬양만 하는 건 아니다.

 

동시에 무언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하던 일을 혹은 욕심을 일정 부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삶에 있어서 아주 간단한 진실에 대해서도 알려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좀 더 이야기와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는 지점이 왜 이렇게 와 닿던지. 어제 도서관에 가서 보니, 자리에 앉은 이들 가운데 책을 읽는 이들보다 핸드폰의 액정화면에 집착한 이들이 더 많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어떻하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마냥 자유로운 영혼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그들처럼 살 자신이 없다. 도시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자신이 없는 거겠지. 그래도 아주 잠깐이라면 체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건장한 허스키들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오로라를 보는 건 어떨까. 그럴려면 핀란드의 라플란드까지는 가야겠지. 아무래도 무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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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3-28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편리함을 상당히 포기해야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그러나 시장과 자본주의에 철저히 붙어 있는 우리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지요.

레삭매냐 2023-03-28 09:16   좋아요 1 | URL
자본과 시장에 매달려 있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연으로의 복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