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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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머리가 복잡하고 그럴 적에 찾는 책들이 있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 그리고 루이스 세풀베다의 얇고 재밌는 책들. 항상 그렇지만 3월은 너무 힘들다. 결산에 이번에는 회사 이전까지 겹쳐서 더더욱. 게다가 직원까지 회사 그만 둔다고 해서 리쿠르트와 인수인계도 동시에 진행해야 할 판이다.

 

이럴 때, 세풀베다의 책이 제격이지. 항상 리뷰 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다. 리뷰를 쓰지 못한 세풀베다의 책이 세 권이나 된다. 빨리 써야지.

 

리뷰 기록을 살펴보니 대강 이 책은 내가 이번까지 해서 4번 정도 읽은 모양이다. 이런 책이라면 정말 본전치기는 한 셈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더 읽게 될 것이고.

 

세풀베다의 책들을 읽으면서 평생 가보지 못할 파타고니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도 미국에서 태어나 말이 너무 좋아서 파타고니아? 아니 팜파에 가서 가우초 생활을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던가. 소설은 칠레 파타고니아 아이센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지난 20년 동안 소도둑과 밀수꾼을 상대한 베테랑 마푸체 인디오 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이다. 그는 아버지 칸테라스 장군의 위세를 업고 소도둑질하던 마누엘이라는 놈팡이의 엉덩이를 장총으로 날려 버린다.

 

칠레를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무법통치한 장군 일당들이 한낱 인디오 형사를 가만 놔둘 리가 있나. 카우카만의 상관은 자신이 아끼는 형사를 정신병원에 넣거나 다른 곳으로 전출 보내야 할 처지에 처했다. 그의 선택은 전자가 아닌 수도 산티아고였다. 번잡한 도시 생활이 싫었지만 카우카만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신병원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쪽팔리게.

 

수도 산티아고는 광활한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누비던 카우카만 형상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공기는 텁텁하고, 사람들로 복잡거리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전출된 곳의 동료 형사들도 그를 찰스 브론슨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 가지 위로라면 첫날 만난 택시 운전사 아니타 레데스마와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이미 수도에 권력자 아들 마누엘의 엉덩짝을 장총으로 날린 형사라는 평판이 널리 퍼진 모양이다.

 

더불어 그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강도도 날로 세진다. , 느와르가 개입하게 되는 건가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고 오판한 칸테라스 장군이 무뢰배를 고용해서 식사 중인 카우카만을 건드린다. 이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마초맨 카우카만 형사는 포크로 건달을 응징한다. 사이다 컷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이야기는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이행 중이던 폰 섹스 산업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다. 폰 섹스에 중독되어 과다 청구된 계산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군부 독재 시절, 고문하는 장면을 녹음한 권력자의 가학적인 성향으로까지 이어진다. 다시 세풀베다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인데, 당시 군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좌파 인민연합과의 전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잡힌 좌파들은 모두 포로들이었고, 그들에게 가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처형 그리고 이어진 실종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었으니까. 전쟁이라는 말로 모든 게 용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거대 권력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개인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한 서사는 결국 칠레의 역사청산 문제까지 도달하게 만든다. 내가 이래서 세풀베다를 좋아한다. 모든 이야기는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풀베다는 고수답게 이런 재미도 추구하면서 동시에 지난 어두웠던 역사에 대해 잊지 말라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왜 현재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지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면서도 명징하게 다룰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마푸체 출신 인디오 마초 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이라는 캐릭터 역시 탁월하다. 양껏 불의를 저지르는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깡다구 하나로 맞서는 카우카만이야말로 이런 느와르 장르에 정교하게 맞춤설계된 캐릭터다. 엔딩에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를 지지하고 지키기 위해 나선 다수의 침묵하는 대중이 등장하는 시퀀스는 감동 그 잡채였다.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핫 라인>을 읽을 수 있을까. 독서 슬럼프는 무시로 나를 찾아올 것이고, 난 그 때마다 <싱글맨>과 루이스 세풀베다를 찾게 되겠지. 고마워요, 세풀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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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3-27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아니 재작년?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작품을 레삭매냐님께서 많이 소개해주셔서 책은 여러 권 구매했지만 핫라인 조금 읽다 만 상태입니다. 독서 슬럼프에 빠지면 그래픽 노블이나 루이스 세풀베다를 읽어야하는 것이군요. 저도 이 책 읽으며 파타고니아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레삭매냐 2023-03-27 13:48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저는 세풀베다 전도사
인가요 ㅋㅋㅋ

그렇죠, 우리는 새로 책을 사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골라 읽는 법이지요.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또 새로운 시선이 생겨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파타고니아, 생전에 가볼 수 있
을까요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