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고려사 1 -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 박시백의 고려사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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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만날 하는 짓이 희망도서로 책을 빌리고 못 읽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반납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이번엔 빌릴 책도 없지 이러다가 신간 코너를 보니 박시백의 고려사와 제프 다이어의 신간이 눈에 띈다. 이러면 또 내가 못참지. 결국 빌리고 말았다. <고려사> 첫 번째 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읽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야기는 정말 고대사 이야기다. 그러면 후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가 중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토지와 노비를 지방 호족 세력들이 발호하던 통일신라 말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 선수들은 특정 벼슬 이상의 진급은 어려웠다. 그러니까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단 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신라 집권층들만 그것을 몰랐을 뿐. 그러니 당연히 왕조 교체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완산주를 기반으로 한 견훤이 먼저 선빵을 날렸다. 병졸부터 시작해서 탁월한 능력을 뽐내면서 구 백제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신라의 중앙 통치로부터 벗어난 견훤 세력은 순식간의 호남 지역을 석권한다. 다음 주자는 바로 관심법의 대가 궁예다. 그는 신라 왕족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썰이다. 천년도 더 지난 일을 지금에 와서 유전자 감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한국 드라마 사에 길이 빛날 명대사와 강렬한 포스의 궁예 역을 연기한 김영철 배우 -


궁예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라의 북방 지역에서 세력을 끌어 모아 할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송악 출신의 왕건을 휘하 장수로 거두며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다. 지리적으로 맞는지 모르겠으나, <고려사> 1권 전반의 주인공인 왕건의 화려한 무대가 펼쳐진다. 궁예는 신라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사로잡아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자만심에 빠져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갖은 악행을 일삼기 시작한다.

 

물론 역사는 승자를 위한 기록이기 때문에, 궁예에게 신종하다 역성 혁명을 성공시킨 왕건과 그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고려 국가에서 궁예를 폄하하는 건 당연한 역사의 수순일 것이다. 만약 궁예가 정말 뛰어난 위정자였다면, 무슨 이유로 왕건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시대의 빌런이 되어야 고려 건국의 당위성이 확보될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사관들이 기를 쓰고 궁예를 천하의 빌런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궁예는 그렇게 왕건을 필두로 한 신진 세력에 의해 축출되고, 왕건 일당은 918년 고려국을 세우게 된다. 이 무렵,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신라는 거의 망조가 들린 상태였다. 당장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오로지 북방의 큰형님 고려에게 의존하는 게 국가 유지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서쪽의 호랑이 견훤이 고려를 제압하기에 앞서 고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신라를 정벌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역전의 맹장 견훤군이 이끄는 후백제 정예병들은 순식간의 신라의 천년 수도 서라벌에 돌입해서 신라를 망국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후대의 조작이 아닐까 싶다. 어디서는 경애왕이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주장도 들어본 것 같다. 어쨌든 아무리 암군이라고 하더라도, 견훤군의 침략이 목전에 와 있는 상태에서 그런 술판을 벌였다는 건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경애왕은 견훤에 의해 자결했고, 서라벌은 쑥대밭이 되었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동맹 신라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지만,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의 기습에 당해 군주인 왕건이 전사할 뻔한 위기도 맞는다. 쿠데타 동지이기도 했던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어쨌든 견훤에게 호되게 당한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은 고려의 짱가라고 할 수 있는 유금필이라는 장군이었다. 홍유나 신숭겸 혹은 복지겸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보았지만 유금필의 존재는 또 처음이었다. 과연 고려를 사수한 장군이라는 저자의 평답게 공산 전투와 고창 전투 같이 견훤 세력과의 중요한 전투의 고비마다 맹활약을 펼친 장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고려의 왕건을 제압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던 견훤은 결국 내부 분열로 무너지고 만다. 후계자를 두고 권력투쟁이 벌어진 가운데 아들 신검의 쿠데타로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고 만다. 아들의 횡포에 절치부심하던 견훤은 3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해서 왕건에게 투항한다. 결국 후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검의 후백제군을 상대한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면서 고려에 의한 삼국통일이 실현되었다.

 

왕건이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을 때부터, 숱한 반란이 발발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아닌 여러 호족 연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임무는 바로 고려 정권을 실제로 지지하는 호족들의 불만을 달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원래 부인이 두 명이었던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딸들을 무려 27명이나 아내로 맞이하는 혼인 동맹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의 유력 인사들에게 자신의 성인 왕씨성을 하사하면서 계속되는 반란을 제압하고, 안정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건국 시조는 세상을 뜨기 전, 훈요십조라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유지를 남겼다. 그런데 이 문서는 공식적인 국가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승로의 집안에서 나중에 나왔다는 말이 있다. 천년이란 세월은 정말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라 그냥 그렇다는 기록만으로도 역사적 사실이 되는 놀라운 마법을 부리지 않는 싶다. 저자는 <고려사>를 그리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절대적 사료의 부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후대에 나온 2차 사료들의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주관적 해석이 너무 추가된다는 문제점도 있다.

 


- 드라마 <보보경심>에서 왕소가 4대 광종에 즉위하는 장면이다. 때깔이 아주 좋다. -


고려의 2, 3, 4대 왕들은 모두 태조 왕건의 아들들이었다. 태조의 후계자들이 국가 운영에 있어 1순위로 삼은 정책 목표는 바로 왕권 강화였다. 왕규의 난 같이 왕권을 위협하는 반란의 이유는 바로 강력한 왕권의 부재였다. 3대 정종 왕요는 아버지를 도운 개국공신들을 숙청했다. 호족들을 중심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이번에는 훈요십조에도 나오는 서경으로 천도를 계획하며 무리한 공사를 시도했다. 949년 정종이 병사하자, 동복동생인 왕소가 25세의 나이로 고려의 네 번째 왕이 되었다.

 

광종은 형 정종이 추진하던 서경 천도를 취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의 일환이었던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밥그릇을 걷어차 버렸다. 평시에는 호족들의 재산 증식에 동원되었던 노비들이 전시에는 사병으로 맹활약했기에 그들은 면천시켜 사회질서를 개편한다는 명목 아래, 호족들의 실질적 기반을 허무는 조치였다. 이어 956년에는 후주 사신 출신 쌍기를 등용해서, 과거제를 도입했다. 신진 관료를 선발해서 군주의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겠다는 향후 천 년간 이어질 관료국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외에도 관복의 색상을 정하고 칭제건원을 시도하는 등 각종 개혁정치가 광종 연간에 실시됐다.

 

하지만 일련의 개혁정치에 대한 호족들의 불만이 가중되자, 960년 권신의 참소를 계기로 개혁정치에서 공포정치로 일관하다가 재위 26년만인 97551세의 나이로 광종은 병사했다. 광종의 후계자 경종은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통합을 이루겠다는 취지에서 보복법(복수법)을 일시적으로 허용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결국 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976년에는 관료들에게 토지와 땔감을 제공하는 수조권을 부여하는 전시과를 실시했다.

 

왕건이 세우고, 왕건의 아들 광종이 나라의 기틀을 잡은 고려는 6대 성종 대에 이르러 국가의 뼈대를 갖추게 된다. 경종의 후사로 훗날 목종이 되는 적장자 왕송이 나이가 어려 사촌동생인 개령군 치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려 성종은 당대 대학자였던 최승로의 시무28조를 받아 들여, 국가의 대개조에 나섰다. 현재의 국립대학격인 국자감을 설치해서, 인재 육성을 시작으로 해서 각종 관제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광종 대의 노비안검법을 폐지하고 다시 노비환천법을 실시하면서 양민이 된 노비들이 다시 노비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햇다. 한편, 음서제를 실시하면서 신분 질서가 고착화되었고 문벌사대부들의 세상이 되었다. 훗날 무신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저자의 역작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새로운 학설에 대한 언급이나 눈과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사실의 발굴 등은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고려 건국 초기, 왕건 일파와 호족 세력과의 팽팽했던 권력 투쟁을 좀 더 극적으로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개국공신들과 군주가 힘을 합쳐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서고, 소용이 다한 개국공신들을 개국 군주의 후계자가 숙청하는 역사의 패턴이 이제는 하나도 새롭지도 않았다. 전작에 비해 디테일이 부족한 문제도 아쉬웠다. 물론 사료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문제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고려사에 대한 개설서 정도로는 괜찮지 싶다. 물론 너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비비드한 동영상 컨텐츠가 더 재밌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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