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2021년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21년 개정판)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는 주간행사처럼 되어 버린 도서관 방문을 했다. 지난주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고도 제법 시간 여유가 있어서 신간 도서와 내가 그동안 놓친 그래픽 노블이 있나 찾아 보기도 했다.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 오래 있을수록 좋은 책들을 만나기 쉽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이런 시간들을 즐기려고 한다. 다만 코로나 시국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하세월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송나라 황제 열전과 신간 소설 하나 그리고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중종실록 편을 빌렸다. 얼마 전에 황현필 선생의 컨텐츠를 너튜브로 시청해서인지 좀 더 중종에 대해 가까워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1506년 중종반정으로 형님이자 폐주 연산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11번째 임금이 되었다. 반정 3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원종, 성희안 그리고 유순정이 실제 반정을 주도했고 진성대군이었던 중종은 거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즉위 초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개국공신들보다도 더 많은 반정공신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폐주 시절 워낙에 폐해가 많았기 때문에 중종 연간에는 그전의 정치들을 제 자리로 돌리는 데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언관들로 구성된 사간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정공신들에 비해 사림 출신의 사대부들은 개혁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그들에게 주자의 성리학적 질서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그런 영역이었다. 하지만 신하된 존재로 기존의 주상을 폐주로 몰아 폐위시킨 반정 자체가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정 사실을 명나라에게는 쉬쉬했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비밀이었다고.

 

중종 초기 강력했던 공신들의 권력의 추는 박원종을 필두로 공신들이 하나둘씩 사망하면서 결국 중종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종 시대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광조가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허수아비 왕 같았던 중종으로서는 다른 공식들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서는 조선 모든 사림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바른 선비 조광조를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중종을 신출내기 과거 급제자인 조광조를 등용해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시키면서 일단의 개혁 조치들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사장에 치우친 과거제 대신 현량과를 통해 신진 인사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조선 개국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와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추진했다. 후자는 실패했지만 결국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자신의 의지대로 문묘에 종상시키는데 성공한다.

 

소격서 폐지를 두고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주상 중종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 조광조. 다음 단계는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책봉된 반정 공신들에 대한 정리작업이었다. 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균형을 잡아 주었다면 이후에 이어지는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와 기묘명현으로 알려진 그의 일파들에 대한 중종의 숙청이 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총애하던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일망타진한 중종이 이번에 신임한 사람은 남곤이었다. 당시 공신들조차 많은 공신들의 존재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자신의 원훈을 반납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박시백 저자는 중종의 입장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던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아울러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그야말로 수신제가 평천하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바른 선비 조광조가 제거된 다음 조선이라는 국가의 학풍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도, 임금 그러니까 권력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급전직하할 수 있다는 것을 기묘사화를 통해 국가가 직접 만천하에 알리지 않았던가. 그저 예전처럼 사장에 집중해서 과거 시험을 치르고, 관직에 올라 보신이나 하는 게 최고라는 걸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임금이 보여 주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중앙정부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기회주의를 부추기지 않았나 싶다.

 

남곤이 죽은 다음에, 세자의 누나를 시집보낸 집안의 김안로 같은 권간의 시대가 열렸다. 어디선가는 왕권이 약했던 중종에 대해 이중인격자라는 비판도 보인다. 특히 경연의 스승으로까지 여기며 총애했던 조광조를 하루아침에 내치고 사사하는 걸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게다가 반정의 성공으로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옥사와 변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가 아닌가. 조선 왕조 동안 숱한 역모가 있었지만 성공한 역모는 딱 두 번이지 않은가 말이다. 성공만 하면 왕후장상의 기회가 열리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장장 38년이나 되는 재위기간으로 조선 왕조 TOP5에 랭킹되었지만, 치적으로는 무엇 하나 꼽을 만한 게 없는 왕이 중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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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2-02-27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종 하면 여인천하!^^;;;;

레삭매냐 2022-02-27 18:30   좋아요 2 | URL
중봉의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와 그 외척이 훗날
발호하게 되는 상황을 그야
말로 드라마틱하게 잡아낸
모양이네요 ^^

mini74 2022-02-27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중종하면 딸바보? 그에 비하면 재위기간 가장 긴 영조랑 참 비교되네요.

레삭매냐 2022-02-28 01:11   좋아요 1 | URL
그리고 보니 중종이 집권 후기
에 가서 김안로를 중용했던 게
세자 누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
었는지도 모르겠네요 ^^

영조는 조선 임금들이 평균
수명이 47세였다는데 정말
장수하지 않았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