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를 통해 바실리 그로스만이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삶과 운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아 정말 30년 전에 나온 그의 책인 <코미짜르>라는 책부터 먼저 만나 보게 됐다. 1990년대에 이미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번역은 예상했던 대로 발번역이었고, 오탈자의 수준은 심각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한글 번역으로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대만족했다.

 

1967년에 그로스만의 이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너튜브에서 검색해 보니 흑백영화로 1918-1922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 적백내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너튜브로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감상이 가능하다. 이제 너튜브는 거의 전지전능한 어떤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의 주인공은 85KG의 냉철한 코미짜르, 그러니까 볼셰비키 인민위원 바빌로바다. 공간적 배경은 우크라이나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대항해서 일어난 백러시아 반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블러드랜드에서도 나치 독일과 사회주의 소련이 가장 치열하게 다툰 전장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와 지하자원 그리고 인민들이 지닌 생산력은 이데올로기 전쟁의 각축장인 셈이다.

 

가장 먼저 바빌로바가 한 일은 동네 생과부와 눈이 맞아 탈영한 혁명 영웅 예펠린을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즉결 처형한 것이다. 코미짜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온갖 속박으로부터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혁명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서사부터 바빌로바는 역설적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제 곧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라는 사실이다. 처음에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에 대해 작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코미짜르 동무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별 짓을 다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바빌로바의 상관들은 그녀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를 베르디비치(그로스만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에 사는 유대인 예핌 가정에 보내 몸을 풀게 한다. 문제는 양철공 예핌네 집에 방이 달랑 하나 있고, 또 아이들이 무려 6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코미짜르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방을 징발해서 코미짜르가 머물게 한다. 물론 보다 부유하고 여유 있는 집에 바빌로바를 머물게 할 수도 있었지만, 보안유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덜 가는 예핌네 집이 선택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코미짜르와의 동거는 재앙이었다.

 

나머지 서사는 피도 눈물도 없던 코미짜르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의 존중함을 깨닫고, 혁명 대의 아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밑바닥 인민들의 삶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설정으로 구성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신파조의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치열한 적백내전과 볼셰비키 혁명을 막기 위해 간섭에 나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소련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바실리 그로스만은 스탈린 집권 시기에 의식해서인지 레닌과 스탈린 못지않게 볼셰비키 혁명 와중에서 큰 공을 세운 트로츠키에 대해 악평을 서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한 지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장한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레온 트로츠키가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체제 친화적 작가에게 이렇게 폄하를 당해도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역시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공부를 좀 해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너튜브의 도움을 좀 받아야지 싶다.

 

훗날 소련을 침공했던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 때문에 적백내전 당시에는 아직 일렀던 히틀러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내전 초기에 코사크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백러시아군의 반격이 매서웠던 모양이다. 아이의 아버지인 키릴도 결국 그들과의 전투 중에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신무기에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백러시아군은 볼셰비키 붉은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소설에서도 패배를 거듭한 바빌로바 부대는 결국 베르디비치를 백군에게 내주고 전술상 퇴각을 해야만 했다.

 

바빌로바는 결국 갓난쟁이를 예핌과 마리아 가족에게 맡기도 절망적 전투에 나서야했다. 바빌로바가 느끼던 내적 갈등은 귀대명령을 받고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투철한 혁명전사로서의 아우라는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아들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성애가 그야말로 폭발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바실리 그로스만이 치밀하게 설계한 설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소비에트 문학의 정수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곁가지를 장식하는 프리스토냐와 나탈리아의 로맨스 역시 덧없게 느껴진다. 프리스토나야와 새로운 삶을 계획하던 나탈리아는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의 포로가 되어 세간의 비난을 받게 된다. 자신에게 신세계를 약속한 프리스토냐는 징병되어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홀로 남은 나탈리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극히 협소했다. 결국 비장하게 자결하는 나탈리아. 그녀 또한 혁명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전장에서 전사한 바빌로바의 아들은 예핌과 마리아의 자식으로 유대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코미짜르에게 혁명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든 유대인 예핌은 혁명이 러시아의 유대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을 약속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천시 그리고 푸대접은 사라지지 않았노라고 강변한다. 전장으로 출발을 앞둔 코미짜르는 진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예핌과 논쟁에 나서지만,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모두 죽고 난 다음에, 혁명의 과실이 다른 이들에게 돌아간다면 지금의 투쟁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에 바빌로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바실리 그로스만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 <코미짜르>의 엔딩은 다가올 비극의 전조처럼 각인되면서 끝을 맺는다. 전장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바빌로바의 눈에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 그 즈음에 성인이 된 바빌로바의 아들 역시 다른 유대인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는 암시일까.

 

편역되어 소개된 <코미짜르>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올릴 한편의 희곡을 보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앞뒤 표지에 실린 각각의 사진 역시 1967년 작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소품 스타일의 <코미짜르>만으로는 아무래도 바실리 그로스만의 역작 <삶과 운명>을 가늠할 수 없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뱀다리1] 노토전쟁이 무언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러시아-오스만터키 전쟁의 한자식 표기였다.

[뱀다리2] 소설의 말미에 오스만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뱀다리3] 원래 이 리뷰는 북리뷰에 실으려고 했으나, 알라딘에서 팔지 않는 책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록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페이퍼로 옮기게 되었다. 알라딘은 모든 책을 커버한다, 단 자신들이 파는 책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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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7 1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헌책방?

레삭매냐 2021-04-27 13:03   좋아요 3 | URL
넵 맞삽니다. 서울책보고 공씨책방에서 주문
해서 읽었습니다.

30년 전 번역이라 아주. ‘허지만‘이 웬 말입
니까 그래.

청아 2021-04-27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알라딘 관계자가 보고 또 출판사 관계자와 솰라솰라 하게되어 재출간 되길 바랍니다!! <삶과 운명>번역도요! 제발! <러시아의 역사>사놓고 방치?중인데 서둘러야겠어요.ㅠㅇㅠ너무모름🤔🧐

레삭매냐 2021-04-27 13:04   좋아요 1 | URL
이거이 편역이라 과연 제대로 번역
이 되었는 지도 궁금하더라구요.

바실리 그로스만이 헷갈렸는지 적백
내전기에 히틀러의 파시스트 타령도
나오고...

여튼 바실리 그로스만의 저작들이
하루빨리 번역되길 비나이다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