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교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은형 옮김 / 지운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의 책장에만 있다면 언젠가는 읽는다. 책쟁이인 나의 신조다. 지난 가을에 중고서점에서 산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를 읽었다. 이 책을 왜 샀는지,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산 모양이다. 제목만 보고는 저자의 특기인 일본 가톨릭 박해사를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추측이었다.

 

<마지막 순교자>에는 모두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타이틀인 <마지막 순교자>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신정부로 넘어가던 1867년 대박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천주교 박해는 아마 에도 막부의 국시였던 모양이다.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이래, 종교의 자유에도 봄이 오나 싶었지만 카쿠레키리스탄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몰락해 가던 막부는 국시를 어긴 천주교 신도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방식의 도도이라는 고문을 가하고 배교를 종용한다. 형제와 자매를 동원한,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 데려다가 고문을 하니 배길 재간이 없었다. 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는 이들도 있던 한편, 키스케 같이 타인이 고문 받는 것을 보고 그만 곧바로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다.

 

키스케의 동료들은 하나 같이 그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를 연상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배교한 키스케가 평안과 구원을 얻었을까? 아니다. 그는 다시 동료들이 갇힌 감옥에 찾아와 스스로 투옥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문과 그에 이어지는 고통이 두렵다. 그 가운데 바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키스케에게 자신을 다시 배신하고 좋고, 도망쳐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역시나 보기 드문 일본의 종교를 주제로 다룬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집의 상당 부분에 1950년대 프랑스에서 희귀한 일본 출신 유학생이었던 자신의 체험을 글로 형상화했다.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리옹을 찾은 패전국 출신 청년은 당시만 해도 두터운 인종주의의 벽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네그로 친구가 새로운 학생으로 왔을 때, 연대하지 못하고 어설픈 차별와 혐오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지성인은 부끄러워한다.

 

동료 시코쿠 쿠니오 씨는 비록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을 버렸으면서도 학장과의 면담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실체는 숨기고, 오히려 화자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거론하니 화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에서 같은 나라 사람이자 동료에게 이런 배신을 당한 저자의 낭패감이 어떠했을지 이해가 되었다. 시코쿠는 귀국해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조교수가 되었다던가. 그러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타이틀 소설 외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군종신부>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 알게 된 지인의 편지로 1950년대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알제리 전쟁에 대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그전의 이야기에서 자신과 시코쿠를 초대해준 프랑스 가정에 대한 반발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로 르블롱 씨의 심기를 거슬렸다지. 편지의 화자는 그저 아무런 삶의 목표 없이, 살고자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그가 원대로 가만 두지 않았다. 기관총 사수로 알제리 전선에 파견되었다고 했던가.

 

알제리로 가는 길에 만난 장교 대우를 받는 군종신부에게 신이 전쟁을 원하고, 신의 피조물인 다른 인간들을 죽이길 원하냐는 엄청난 질문을 던진다. 원래 알제리가 프랑스의 땅이었던가? 아니다. 알제리는 알제리 사람들의 땅이고, 프랑스 사람들은 그곳을 자원과 인력을 약탈할 식민지로 삼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들어온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할 차례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지배할 이유가 있다면, 알제리 사람들은 그들대로 민족해방과 독립을 주장할 이유가 있다.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의가 충돌하면서 무력투쟁은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 되었다. 군종신부가 궁색하게 내놓은 신은 정의로운 전쟁을 원한다는 따위의 설교는 천 년 전 십자군 전쟁에나 걸맞은 구호가 아닌가 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 우물이 오염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방단을 조직해서 아무런 혐의 없이 만주인들을 의심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을 떠나 프랑스에서 연극배우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동생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어느 아버지(아마도 자신의 경우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자신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이 원주민들을 배척하고 핍박한 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난징과 인도차이나에서 전쟁 중에 일본군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양심적인 지식인 부류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도움이 안돼>에서는 폐병으로 요양차 병원에 입원한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상에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병원에서 제각각 나름의 소용이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약사는 동료 환자들에게 공짜 약을, 요리사는 병원의 맛없는 밥으로 야식을, 전파사 수리공은 라디오를 고친다. 그렇다면, 연필과 종이로 벌어먹고 산다는 편견의 제물이 된 소설가는? 타인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는 핀잔을 먹기 일쑤다.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 문제에 대해서도 소설가는 똑 떨어지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결론은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소설가라는 직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가들의 위한 변명도 또한 많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 쓰는 이들이나 독자의 범위에 포함된 이들에게나 먹힐 법한 이야기다. 먹고 사는데 바빠서, 혹은 너튜브에 혼이 팔려 소설이나 문학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도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닌가 말이다.

 

연휴의 끝물에 무언가 흥미로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예전에 사서 쟁여둔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나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구나. 중고서점에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집이 떴다고 하던데 당장 나가서 사와야겠다. 이달에는 읽을 책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적어도 읽을 책이 없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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