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자크 아탈리 지음, 이재룡 옮김 / 사월의책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만약 살만 루슈디의 <28개월 28일 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영영 모르고 살았으리라. 그 책에서 만난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의 실존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자크 아탈리의 이 탁월한 소설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로 인도했다. 책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이런 우연이야말로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로 프랑스 외무부와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지원으로 11년 전에 만들어진 이 책은 지금 절판 상태다. 이렇게 좋은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책 중의 하나인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이 책도 절판됐다)가 이슬람이 지배하던 안 안달루스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는 이슬람 안 안달루스 지배의 절정기를 그린다.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유대인 사상가 모세 벤 마이문과 이슬람 의사이차 철학자인 이븐 루시드, 서구에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한 철학자 선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봉자라는 점을 사전에 알려주고 싶다.

 

이들이 생존해 있던 12세기, 안 안달루스는 알모아데족을 중심으로 보라산의 종교지상주의자 알 가잘리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시절이고 종교적 광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알모아데 제국의 수도 코르도바는 그동안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를 믿는 이들이 조상 대대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온 문화와 학문 그리고 사상의 중심지였다.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종교적 관용은 제국을 번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알모아데 정권의 광신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코르도바의 이교도들과 이단들을 심판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안 안달루스에 무슬림들 보다 먼저 건너와 살던 유대인들이 첫 번째 타겟이 되었다. 의학과 상업에 특화된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이 제국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레온-카스티야-아라곤 같은 기독교 왕국보다 그동안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온 이슬람 정권에 더 호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모아데 정권이 종교적 광신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개종, 이주 혹은 사형이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앞두게 되었다.

 

모세의 외삼촌 엘리파르가 광신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외삼촌이 사형당하기 전에 십대의 영민한 조카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를 전해 주면서, 모험과 12세기 매혹적인 알 안달루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인간과 신의 영역 그리고 우주 생성의 비밀까지 아우르려고 했던 위대한 철학자가 인류에게 남긴 책을 찾는 미션에 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같은 책쟁이들을 유혹하는 말이던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는 책이라고 하는데 만나고 싶지 않은 책쟁이가 있단 말인가. 결국 코르도바의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할 운명이었다.

 

엘리파르는 조카에게 몇 가지 단서들과 알렉산더와 제우스의 얼굴이 새겨진 희귀한 테트라드라크마 한 닢을 남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미션은 너무나 위험한 임무였다. 책을 찾아 나선 구도의 길에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위험한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크기에 모세는 톨레도와 툴루즈 그리고 나르본을 거치는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이븐 루시드에게 알모아데 제국의 실력자 이븐 투파일이 같은 테트라드라크마를 건네주면서 같은 책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진리를 추구하던 철학자였던 이븐 루시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이자 대범한 철학자였던 이븐 루시드는 이성과 계시의 경계에서 전자에 무게중심을 둔 발언으로 언제라도 이단으로 몰려 사형대에 오를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종교지상주의자들에게 이븐 루시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권력자들의 비호가 없었더라면 그 역시 엘리파르처럼 화형대에 올랐을 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종교재판 이전에, 이미 무슬림 세계에서도 화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헤매던 두 젊은이는 십여 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결국 알모아데 제국의 수도 페스에서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던 보편적 진리의 신봉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경쟁자로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무하마드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 국가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광신이 아닌 이성과 과학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광풍이 몰아닥치던 12세기에 그런 합리적 사고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아마 이븐 루시드를 후원하던 제국의 총리 이븐 투파일이 없었다면 이븐 루시드는 진즉에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다.

 

무슬림 제국의 무슬림으로 살았던 이븐 루시드에 비해 어디에서고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모세 벤 마이문은 12세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다. 삼촌에게 일찍이 비밀결사 후보자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지식과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모세는 위험천만한 인간이 쓴 것에 가장 중요한 책을 찾는 여정에 나선 것은 우주와 인간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진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슬림들의 핍박에 맞서 자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무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열혈청년 모세의 동생 다비드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무력투쟁에 나섰던 마사다 요새를 언급하며 단검 던지기를 수련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훗날 홀로코스트에 무력했던 유대인 공동체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비밀 결사단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밀의 책을 찾는 두 주인공의 모험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것이 종교적 광신에 대항하는 이성의 대표선수들인 모세와 이븐 루시드의 현란한 대화다. 소설에서 최고의 압권은 모든 비밀의 끈을 쥐고 있는 페스의 저명한 랍비 이븐 슈샨의 두 주인공에 대한 시험이 아닐까 싶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물론 그에 뒤따를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는 각자의 유의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처럼,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 역시 자크 아탈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책이다. 자그마치 소르본 대학 출신의 인문학자 자크 아탈리는 12세기 알 안달루스와 마그레브를 배경으로 위대한 예언자가 남긴 불멸의 책을 찾는다는 가설에 입각해서, 다양한 소재들을 절묘하게 배합한 불후의 드라마를 창조했다. 아니 넷플릭스는 이런 이야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 영상으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식인들의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는 가운데, 종교적 광신에 저항하는 이성과 과학의 결합이 궁극의 선에 도달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권력자 이븐 투파일과 철학자 이븐 루시드의 대화 중에 나오는 좋은 소설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쓰인다는 문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당연히 내가 만난 올해의 책 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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