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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평점 :

지금 막 베트 미들러가 부른 흥겨운 스타일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들었다. 뭐 춘수 씨의 첫 번째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랑 뭔 상관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제 <나이트우드>를 다 읽고 나서 후련한 마음에 집에 가려는데, 가방에 읽을 책이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사무실 책장에 쟁여둔 책 중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었다. 얍실하니 3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그런 책으로. 그리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가 당첨!
집에 가는 길에 표제작인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긴 거리도 아닌데, 역시 춘수 씨의 가독성 하나는 알아 주어야 한다니깐. 두 편의 장편을 발표하고, 그야말로 풋내기 작가 시절에 여기저기서 청탁을 받아 쓴 7편의 단편들이 오롯하게 수록된 게 바로 <중국행 슬로보트>다. 오래 전에 득템해둔 책인데, 6~7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다니. 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춘수 씨의 팬은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그의 책을 읽는 건 또 무언가. 아마 줄리언 반스의 경우가 비슷한 게 아닐까.
1990년대 춘수 씨의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가만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참고로 그 시절에는 춘수 씨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땐 뭐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춘수 씨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쿨함에 우선 포인트를 주고 싶다. 주인공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요즘 한참 대세라는 누구처럼 마구잡이로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넘어온 세대들이 이제는 사회의 움직이지 않는 꼰대로 자리 잡았지만, 암튼 그 땐 그랬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잔디 깎는 청년은 물론 어느 사모님과 일탈에 빠지기도 한다. 마지막 일터에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고용주가 주는 샌드위치와 맥주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아, 어디선가 누군가가 제공하는 선의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던가. 설렁설렁 일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일이 재밌어서(그것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보수에 상관없이 열심히 잔디를 깎았다고. 요런 쿨함이 바로 삼십대 초반 춘수 씨의 장점이었나 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휙휙 넘긴다. 가난한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지낸다는 설정은 좀 그랬다. 이게 뭐야!
표제작에서는 중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춘수 씨의 경험으로 추정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시험을 보러 가서 만난 중국인 샘의 이야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대륙에서 서로 죽이는 그런 관계였던 두 민족 사이에서 화해가 가능한 지, 그 점이 나는 궁금했다. 뭐 아직 영맨이었던 시절 춘수 씨의 천진난만함 아니면 특유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전공투 세대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지도 참.
애인과 싸우고 호텔에 지내면서 아마도 피아노 레슨을 하는 젊은 여자와 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애인과 한바탕 싸우고 둘이 와야 할 휴가를 홀로 지내는 주인공. 게다가 5일 예약을 숙소에는 연일 비가 내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매력남 춘수 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한물간 책들로 비수기 호텔 도서관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과 스무고개 게임을 하는 춘수 씨의 젊은 날은 정말 스타일 넘치는 재기로 가득했다. 셜록 홈즈 뺨치는 추리력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지평을 넓혀가는 탁월한 재주란! 게다가 역시나 그는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 절묘한 후퇴 전략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 연애의 고수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막힌 재주가 아닐 수 없다.
3월의 마지막 20분을 남겨 두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개운했다. 가끔은 이런 불량식품 같은 맛의 책을 읽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너무 딱딱하고(어제 읽은 <나이트우드>가 그랬다),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읽는 그런 독서가 아닌 무한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는 그런 독서 말이다. 책장을 보니 춘수 씨의 <반딧불이>와 <회전목마의 데드히트>가 더 있더라. 나중의 슬럼프를 대비해서 이 책들은 예비해 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