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 - 상실의 글쓰기에 대하여
안드레 애치먼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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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달궁 책모임에 갔다가 의례처럼 종로책방을 찾았다. 무언가 득템하리라는 기대를 걸고서. 보통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날은 원하던 책을 구할 수가 있었다. 바로 안드레 애시먼의 <알리바이>였다. 아니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헌책방에 이럴 수가. 가격이고 뭐고 볼 필요가 없었다. 사야 하는 그런 책이었으니까.

 

집에 오는 긴 여정 길에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음껏 독서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다가 잠시 접어 두었더랬다. 평소라면 바로 다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사실 <알리바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의 난민 그리고 결국 미국 할렘에 정착한 세계인의 넋두리 같은 글들이 담긴 에세이였으니까. 아마 소설이라면 맥이 끊길지 몰랐지만 적어도 <알리바이>만큼은 그럴 일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그전에 하도 좋다는 말을 듣고 작가의 다른 책인 <콜 미 바이 유어 네님>을 샀더랬다. 하지만 잘 읽히지가 않아 읽다 말았었다. 그런데 뭐랄까 어쩔 수 없이 어느 곳에서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런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안드레 애시먼의 시원을 알고 나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대한 관심이 일어 두 책을 병행해 가며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작가가 직접 방문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 보르디게라가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소설의 말미에서 만난 문구대로 우리는 모두 왔다가 가는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는 왜 무엇엔가 집착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쓰는 걸까. 터키에서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건너온 유대계 애시먼의 부모님들은 다시 한 번 점프를 시도한다.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로마였다. 그리하여 애시먼은 두 개의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더 멀리 애시먼 집안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5백 년 전 에스파냐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애시먼은 조상 중의 잔존자를 찾아 바르셀로나와 헤로나를 찾는다. 믿어지는가? 헤로나가 잘 꾸며진, 유대인들을 위한 테마 파크라는 표현에서는 정말 빵 터졌다. 바로셀로나 거리에서 다양한 군상을 한 인간 조각상들을 보며 기술한 장면에는, 결국 인간의 모방품을 모방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느끼기도 했다.

 

모든 기억은 왜곡되는 법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회고록 <이집트를 떠나며>에 등장하는 부분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고백은 정말 마음에 들더라. 기억의 불완전성을 탓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기억이란 그런 법이라며 자신의 왜곡된 감정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참... 어쩌면 부제로 따라 붙은 상실의 글쓰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하바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시절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아마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자전적 소설 <하바드 스퀘어>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기이하게도 그 동네 택시 기사들은 모두 아이티 출신이었지 아마. 멀티플렉스 시네마에서는 상영하지 않는 독립 혹은 예술영화들을 상영하던 브래틀 시어터를 작가도 자주 찾은 모양이다. 브래틀 시어터에서 본 <베를린 천사의 시>(아마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셋>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그래서 더 그의 글에 애착이 가는 걸까. 여전히 그 동네에 살았다면, 그가 고급 향수를 샀다는 브래틀가의 그 약국 순례길에 나서지 않았을까. 그의 발자취를 찾아 어쩌면 지금은 문 닫았다는 카페 알제에도 가봤을 지도.

 

한 때 마틴 스코시즈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던 우디 앨런이 사랑하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춥디 추운 겨울 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타령을 하며 브루클린 브리지를 코를 질질 흘리며 걸었었지. 구경이고 뭐고 너무 추웠던 기억 뿐이다.

 

<알리바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애시먼 선생의 글은 <자기 충전>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그리고 나만의 우주가 필요한 건 당신 뿐이 아니랍니다. 나도 그래! 어쩔 때는 무심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을 보며 멍 때리는 일도 필요하다. 대학 시절, 나의 두다리 선배는 가끔은 하늘을 보라고 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살이에 분주해서 그런 짬이 도무지 않는구려. 나를 추스르는 시간이라,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나의 그런 귀중한 시간에, 영영 오지 않을 영광을 누리고 찬사를 갈구하며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마구잡이로 타이핑하는 지도.

 

이런 광휘를 영롱하게 빛나는 글들을 지어내는 분산된 정체성의 작가를 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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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3-07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장소에 가기 전에 서점이나 책방에 방문하는 일,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대학생 때 서울에 가면 일찍 출발해서 헌책방이나 알라딘 서점에 갔어요. 달궁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삽하나님, 마욤님, 헤르메스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2011년 5월 21일에 제가 펭귄클래식 <제인 에어> 독서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때 레삭매냐님도 참석하셨나요? 그 날 어느 분을 만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네요. 기억나는 분은 영화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한 무당광대님 뿐이네요. 다행히 <제인 에어> 독서모임에 대한 기록이 제 블로그에 있네요. https://blog.aladin.co.kr/haesung/4805557

레삭매냐 2020-03-07 13:07   좋아요 0 | URL
저는 만날 지각이라 보통 끝나고
가게 되더라구요.

램프의 요정하고는 또 다른 구성
인지라 책을 찾는 재미가~ 무엇보
다도 램프의 요정보다 단가가 싸
다는.

모두들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지난 달에는
패스하게 되었네요 증말 -

9년 전 모임!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안 빠지고 거의 나가곤 했던 것 같긴
한데 말이죠 ㅋㅋㅋ

scott 2020-03-07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완독 축하 합니다. 콜미 바이 한국어 번역판 비추!이책을 시작으로 이분에 작품을 차례차례 읽어나가시길 바랍니다 ^.^

레삭매냐 2020-03-07 23: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아마 판권이 두 출판사로 나뉜 것 같은데
전 개인적으로 영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소장용으로 <하버드 스퀘어> 원서는 주문
했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