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절벽 위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21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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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산지도 기억할 수 없는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세 달에 걸쳐 읽었다. 분량은 정말 적은 데 왜 이렇게 오래 시간이 걸렸을까. 푸르르메리트 훈장에 빛나는 전쟁 영웅 윙거의 이번 저술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지배에 대한 상징을 모호하게 다루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던 게 아닐까.

 

아무리 봐도 윙거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모호함의 극단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과 오토 형제가 거주하는 평화로운 마리나는 세계대전 이전의 평화로웠던 시절에 대한 윙거의 회상이다. 소설의 첫 문장인 행복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총아들이던 산업가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무지막지한 이윤의 추구를 위해 획기적인 전기가 필요했다. 특히나 자본주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은 경쟁자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식민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전쟁뿐이었다. 전쟁이 다수의 민중에게는 불행의 근원이었지만 극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수정주의 시각에서 독일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히틀러는 산업자본가들의 고용인이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불한당들의 우두머리 산림감독원장은 총통 히틀러나 그의 숙적이었던 스탈린 혹은 제3제국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으로 봐도 무방하다.

 

독일을 상징하는 슈바르츠발트라고 명명하고 싶은 캄파냐의 지배자인 산림감독원장 일당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것은 마치 다가오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과도 같았다고 할까. 곤충과 식물을 사랑하고, 그것들의 표본과 색인을 다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인간의 박피 헛간은 그야말로 야만과 폭력의 상징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산림감독원장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나와 동맹군들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마리나의 동맹군이자 용감한 전사였던 벨로바르 노인의 최후는 죽은 전사들이 간다는 발할라의 제단을 떠올리게 했다. 윙거가 반전을 주장하는 작가였다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투 대신 협상이나 대화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겠지만 5년간의 대전쟁을 몸소 겪은 전사는 반대로 그런 영웅적인 죽음을 찬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징한 사유의 저변에 깔린 저자의 본질을 슬며시 엿본 듯한 느낌이랄까.

 

결말 부분에 야만적인 산림감독원장 일당의 추격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주인공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장면은 독일 민족의 뇌리에 각인된 붉은 수염의 전설,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의 기사회생한다는 기적적인 행운을 문학적으로 재현해내지 않았나 싶다. 화염에 싸인 수도원과 마리나에 대한 묘사는 책이 발표된 후 6년 뒤에 총통이 약속했던 천년제국 게르마니아의 수도 베를린이 불과 집권 12년 만에 적군의 손에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 장면을 예언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해를 넘기지 않고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다 읽게 되어 다행이다. 결국 못 읽을 책은 없다는 건가. 문득 나의 서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도끼 선생들의 책들이 눈에 밟힌다. 아무래도 내년은 도끼 읽기의 해로 삼아야지 싶다. 첫 도전은 내가 유일하게 읽었다고(리뷰는 쓰지 못했다) 자부할 수 있는 <죄와 벌>로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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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2-03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이 책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닌 거 같은데요. <강철폭풍 속으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패스했었나, 아리송.... ㅎㅎㅎ

레삭매냐 2019-12-03 16:06   좋아요 0 | URL
<강철 폭풍 속으로> 굉장히 기대를 하고 도전
했었는데 무려 세 번이나 도전한 끝에 다 읽었
네요.

이 책도 쉽지 않더라구요.

북프리쿠키 2019-12-03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에 한길그레이트북스 책은 몬가요??ㅎ

레삭매냐 2019-12-03 16:06   좋아요 1 | URL
어제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랍니다.

북프리쿠키 2019-12-03 16:13   좋아요 1 | URL
ㅠ 아~저도 아렌트 누부야 글 앞에서 좌절하고 반틈 읽다가 덮어두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