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댓 맨 이즈
데이비드 솔로이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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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us love what is eternal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지난달엔가 이달에 데이빗 설로이 작가가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전에 사두었다가 지금껏 펴보지 않았던 설로이 작가의 <올 댓 맨 이즈><스프링>을 펴들었다. 곧 이어 <올 댓 맨 이즈>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과연 설로이 작가가 방한하기 전에 책이 나올지 궁금했는데 다행히 지난 주말이 시작되기 전에 책을 주문해서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분량이 제법 되긴 했지만 고대해 마지않던 책이라 그런지 기대감으로 금방 읽었다.

 

우선 <올 댓 맨 이즈>는 장편인가 아니면 단편소설집인가. 형식으로 보면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4월부터 12월까지 모두 9편의 남자 주인공들(제목이 말해준다)이 차례로 등장해서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쩔 땐, 주인공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을 매개로 설로이 작가는 21세기 유럽의 풍경을 담아낸다. 무언가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길 바라며 유럽의 각처를 여행하는 17세 소년 사이먼과 퍼디낸드가 첫 번째 세그먼트를 장식한다. 우연히 만난 지인의 거처를 찾아 기식하는 그네들의 모습에서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식민주의자들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내가 오래 전에 찾은 베를린의 모습은 우중충하고 추운 5월의 어느 날로 기억될 따름인데. 내 사진을 찍어 주려다 자신의 카메라를 떨어뜨린 여학생도 있었지. 생각이 좀 다른 친구 간의 여정이 내게는 좀 아슬아슬하게 다가온다.

 

프랑스 릴에 사는 베르나르의 사이프러스 행은 또 어떤가. 학교를 중퇴하고 외삼촌에 호의에 기대야 함에도, 다짜고짜 휴가를 요청하는 철부지의 모습이 눈에 거슬리는 걸 보면 나도 꼰대인가 보다. 나도 베르나르처럼 같이 호주 배낭여행에 가기로 했던 후배가 사정으로 가지 못하게 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타의에 의해 나홀로 여행에 나선 베르나르의 처지가 절절하게 이해가 됐다. 그리고 광고와 달리 전혀 쿨하지 않은 호텔에 묵게 된 베르나르의 여행 동료가 되다시피 한 샌드라와 샤미언 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일대 사건은 라틴 남자가 지닌 남성성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로맨스를 꿈꾸는 이십대 청년의 발칙한 상상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중세 연구를 하는 카렐이라는 청년은 자신이 폴란드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고급 SUV를 배달하는 도중에 접촉사고로 도장비를 물어 주어야 하는 사고를 친다. 그건 곧 합류한 여자친구가 던진 폭탄선언에 비하며 아무 것도 아니다. 임신이라니... 아마 카렐이라는 친구의 미래에는 임신이나 결혼이라는 계획은 들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한 차례의 불장난으로 그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장 직면한 문제보다 천 년 전, 중세 어원 연구에 정력을 쏟는 이상주의자는 현실적 해결책을 여자친구에게 제시해 보지만 결과는 답답하기만 하다.

 

어떤 남자는 런던에서 매춘을 하는 고향 출신 여성에게 연정을 품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고객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자신이 엑스팻(expatriate)으로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에 갔다가 현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남자도 등장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네덜란드인 한스피터르는 버젓하게 애인도 만나고 네덜란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그에게는 친구 하나 없다. 자신의 운에 마가 끼었다는 말에 그는 푸닥거리에 능하다는 무당 혹은 점쟁이를 찾아가 들으나마나 싶은 이야기를 듣고 50유로를 뜯긴다. 그러니까 되는 놈은 무얼 해도 되고, 안 되는 놈은 무얼 해도 안 된다는 말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고, 그들에게 닥친 문제들도 십대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덴마크에 사는 황색언론 종사자인 크리스티안은 장관의 스캔들을 어떻게 폭로해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 긍정적인 돈벌이로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조건보다 더 나은 조건을 만들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로전에 나서야 한다는 게 크리스티안의 속마음이다. 그런데 자신 역시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던가. 팩트 체크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소송 전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방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크리스티안은 오늘도 스캔들을 향해 돌진한다.

 

중반을 넘으면서 소설은 <올 댓 맨 이즈>의 주인공들을 비로소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도 설로이 작가의 설정이었을까. 한 때 세계에서 철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을 거둔 알렉산드르는 심각한 소송전의 패배로 이제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니 이미 그는 파산한 상태다. 현재 자신의 쌍둥이 자녀의 어머니인 동거녀는 결별을 선언하고, 파산한 배우자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요구한다. 사실 알렉산드르는 언제 자살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다. 마지막 여행일 지도 모르는 지중해 코르푸 섬을 찾아, 자신의 전담 변호사로부터 현재 재정 상황을 보고 받는다. 보통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생활 유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보장되는 자산이 있지만, 그에게는 무의미할 따름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알렉산드르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영국 귀족은 파산한 그가 식사 값을 내길 바랄 따름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 이제 이야기는 돌고 돌아 마지막 세그먼트의 주인공 토니 파슨을 만날 차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구성의 소설인가. 토니는 첫 번째 세그먼트에 등장한 사이먼의 할아버지다. 토니 역시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 아르젠타의 별장을 찾은 엑스팻이다. 손자 사이먼이 쓴 시를 감상하고, 나홀로 여행을 즐긴다. 그가 받았다는 기사 작위도 심장수술과 불의의 교통사고라는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렇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토니는 체험한다. 지난 이십년 동안, 부부라기보다 동반자 같은 존재였던 조애너가 뉴욕에서 야간비행기로 토니를 간호하기 위해 찾아온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들이 별거하게 된 원인 제공자가 토니가 아니라 조애너였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래 맞아 살아 보니 인생은 농담이 아니더라. 과연 이런 성찰을 십대 소년이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나도 그 시절에는 영원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또 역설적으로 미래의 엘리트로 옥스퍼드에 입학한 사이먼은 자신의 시에서 영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의 질감에 몰입하는 무아지경의 순간에 대해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세대를 초월한 영원에 대한 갈구라고 해석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페리투라(덧없음)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에테르나(영원)를 추구할 것인가. 이에 대해 삶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가치중립적인 명제만이 떠오를 따름이다.


유럽의 곳곳을 도는 9명의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데이빗 설로이의 <올 댓 맨 이즈>는 과연 매력적인 독서 체험의 시간들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십대들의 욕망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장통을 겪는 청년의 기묘한 나홀로 여행, 연정으로 폭력을 휘둘러 일자리를 잃게 되는 남자, 여자친구의 폭탄선언에 충격 먹은 중세 연구자, 파산 위기에 내몰린 거부 그리고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이야기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황홀했다. 이번 방한과 <올 댓 맨 이즈>의 출간에 힘입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계속해서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최근작인 <터뷸런스>가 기대된다. , 이제 오늘 작가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가서 무슨 질문을 할까, 행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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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07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께서는 세계문학작품을 정말 폭넓게 읽으십니다. 문학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는데 레삭매냐님 덕분에 대리만족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19-10-07 11: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그저 이러저러한 경로로 알게 된 작가
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줄기차게 읽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