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바다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 지음, 안금영 옮김 / 사람과책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솔직히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다음에 읽어야 할 책들이 줄지어 서 있고, 또 읽다만 책들도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지금 독서를 와중에도 하는 마당에 그런 고민이 끼어들 틈이 없다. 게다가 읽던 책에서 새로운 미지의 작가나 책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바로 점프를 감행한다. 지난주에 만난 산티아고 감보아의 <밤 기도>에서 나는 스페인 출신 작가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을 알게 됐다. 아니 어쩌면 그전에 볼라뇨를 통해 알게 되었을 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내에 소개된 책이 두 권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23년 전에. 한 권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만 다른 한 권은 절판된 책이었다. 그리고 바로 중고로 주문했다. 어제 내 손에 들어왔고, 바로 읽기 모드로 돌입했다. 몬탈반의 1979년작 <남쪽 바다>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시작은 바르셀로나의 어느 악당들의 폭주다. 짧은 추격전은 끝나고,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된다. 저명한 재벌급 인사 스튜어트 페드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프랑코의 죽음으로 기나긴 독재가 끝나고 바야흐로 스페인 민주화가 시작된 직후로 보인다. 고인의 미망인 미마와 변호사가 사립 탐정 페페 카르발로(진짜 주인공이다!)를 찾아와 사건을 의뢰한다. 그런데 그들은 카르발로에게 살인사건의 원인이나 이유가 아닌 스튜어트 페드렐이 지난 죽기 전 1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다. 시작부터 기묘하다.

 

비스쿠테르라는 기가 막힌 리오하 요리를 만들 줄 아는 조수를 둔 카르발로는 반 프랑코 운동 전력 때문에 아메리카에서 20년 간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그의 도덕적 경력에 대해서는 검증 완료. 아마도 중년으로 보이는 카르발로의 주변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를 흠모하는 여성들이 끊이질 않는다. 고인의 딸 예스/예시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 한 가지 더, 더럽게 재밌는 책을 불태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카르발로를 친구들은 분서광이라고 부른다. 책쟁이로서 다 읽은 책을 그것도 더럽게 재밌다는 책을 주저하지 않고 불태우는 느낌은 어떨지 조금 궁금해졌다. 이건 중고로 팔거나 나눔하는 것보다도 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도발적이다.

 

스튜어트 페드렐의 전적을 조사하는 와중에 카르발로는 고인이 부유한 색정광이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남쪽 바다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는 점도. 그가 남긴 남쪽 바다에 대한 메시지가 담긴 쪽지를 단서로 스튜어트 페드렐의 행적을 추적하는 장면은 역시나 당대 스페인 최고의 작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간에 빵구를 낼 듯이 마셔대는 블랑 데 블랑 같은 포도주에 대한 탐닉과 자신에게 오는 여자들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유능한 사립 탐정 카르발로를 규정하는 어떤 상징과도 같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푸스테르와 함께 독서광이자 교수 세르지오 베세르의 집에 가서 양파를 곁들이지 않은 정통 발렌시아식 빠에야 요리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스튜어트 페드렐이 남긴 단서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장면은 정말 멋졌다. <황무지>는 독서광에게 쉬운 편이었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남쪽 바다의 운율까지 들먹이며 1959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살바토레 콰시모도의 시까지 연결하는 장면에서는 살짝 전율하기도 했던 것 같다. 참고로 콰시모도의 작품은 국내에 번역된 게 없다.

 

그렇게 소설의 절반 정도를 노닥거리며 보낸 카르발로는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누가 스튜어트 페드렐을 죽였는가라는 탐정소설 방식의 추적이 아니다. 내 진짜 관심은 스페인내전에서 승리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철권통치를 끝낸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이다. 프랑코 치하에서의 강제된 금욕주의는 찬하의 바람둥이 카르발로의 엽색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연 정치가 들끓는 개인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남쪽 바다라는 이상향으로 가고자 했던 스튜어트 페드렐 역시 카르발로와 다를 바가 없는 색정광이었다. 다만 전자가 자제력을 가졌다면 후자는 전혀 그러지 못했고, 결국 비참하게 누군가의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바르셀로나 그중에서도 지금은 쇠락한 산마힌 지구의 개발은 주도한 것이 바로 스튜어트 페드렐, 플라나스 그리고 문트 후작 악당 삼총사였다. 프랑코 시절 경제성장 신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기도 했던 날림공사, 부동산특혜로 점철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몬탈반 작가는 카르발로의 입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산마힌을 비롯한 대다수 대중들은 원조 파시스트 프랑코 치하가 좋았다는 흘러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사회 정의나 복지 혹은 공정한 분배 따위는 모르겠고 그저 오늘의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의 논의가 이미 그 시절에도 대중들이 나누는 어젠다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주인 없는 땅이었던 공유지 개발로 한몫 챙겼던 악당들이 이번에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20년 만에 다시 산마힌을 노리고 있었다. 자유시장경제주의를 신봉하는 기업가 행세를 하는 악당들에게 민중들은 오래된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대를 이어 그래도 프랑코 시절이 좋았지를 노래하는 그네들의 모습이 왜 그렇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바탕 소동을 겪고 카르발로는 사건을 해결한다. 모두가 원하는 방식으로. 어차피 소설에 나오는 사건은 해결되게 되어 있지 않던가. 에타(ETA) 조직원 행세를 하는 빵집 주인의 바람난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가외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이재에 밝은 인간 같으니라구. 몬탈반 작가가 슬쩍슬쩍 흘리는 카르발로의 과거도 흥미롭다. 한 때 교사로도 활약하기도 하고, 수형생활도 한 것으로 추정되고 프랑코 반독재 운동의 경력을 가진 캐릭터 설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프랑코 독재정치를 찬양하는 이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결국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도망친 운명의 귀결이 어떠했는지 보여 주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렇게 말끔하게 사건을 처리한 카르발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작은 비극을 마주한다. 아무래도 몬탈반의 다른 작품인 <문신>도 읽어봐야겠다. 왜 이렇게 좋은 작가의 책들은 소개가 되지 않는지 그저 아쉬울 뿐이다.


[뱀다리] 소설에서 누군가 1977년 선거에 투표했냐는 질문이 등장하는데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만한 그런 선거가 아니었다.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 프랑코가 죽은 뒤, 무려 41년 만에 스페인에서 최초로 치러진 민주주의 선거였다. 노력한 만큼 보이는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19-09-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이 꽤 많은거 같은데 국내엔 단 두 권 뿐이라니 아쉽습니다. 범죄소설이 문학상까지 받고 꼭 읽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네요. 일단 중고알림을 신청했네요. 늘 보석같은 책 알려주시니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09-26 13: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제가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어디서는 16편의 소설에 또 어디
서는 자그마치 25편의 소설의 주인공
으로 등장한다고 하네요.

1972년부터 2004년까지 페페 카르발
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 나
왔다고 합니다.

암튼 프랑코 사후 스페인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사회파 소설로도 충분히 가치
가 있었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