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는 <캄포 산토>에서 독일 문학의 각성을 촉구했다. 시류에 영합한 문학이 아닌 진정한 전쟁에 대한 반성과 ‘문학적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문학은 기억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폐허문학을 실천에 옮기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하인리히 뵐을 꼽았다. 독일 출신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지만, 우리에게 소개된 책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게 제발트는 나를 뵐의 <천사는 침묵했다>로 인도했다.

 

하인리히 뵐이 죽은 뒤 미발표 원고로 발표된 <천사는 침묵했다>의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병이다. 독일 민족은 물론이고 수많은 유럽의 생명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지만 한스는 도망자 신세다. 적어도 한스에게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가짜 신분증을 요구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의사는 한스에게 가짜 신분증을 주는 대신 돈을 바란다.

 

히틀러와 나치 일당이 통치하는 시간은 끝났지만, 이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생존이라는 좀 더 엄혹한 시절이 도래했다.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빵과 담배가 필요하다. 전자가 삶의 직접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간으로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욕망을 대변한다고 해야 할까. 하인리히 뵐이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구사하는 폐허문학의 정수는 전쟁 자체가 제공한 참혹함이라기 보다, 살아남은 이들의 이런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까. 모든 게 자신이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으로 환산되는 전후 독일에 대한 치밀하고 생생한 묘사야말로 당시를 체험한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레기나 웅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이 보유한 모든 물건들을 내다 판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삶의 공간에 스며든 한스 슈니츨러를 위해 귀한 카메라를 판 돈으로 신분증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한스는 5월의 추위를 덜어내기 위해 석탄을 훔친다. 생존 앞에 수치심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아마 베를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5월의 베를린 날씨가 어떤지 모를 것이다. 너무 추워서 아무 매장에나 들어가 5유로하는 싸구려 스웨터를 사 입고 돌아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레기나는 매혈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때 세계를 제패하던 게르만 민족의 자긍심은 어디로 가 버리고, 자국을 점령한 연합군의 호의에 매달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가 넘쳐나는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종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신도 막을 수 없었던 전쟁이 끝난 뒤, 뒤치다꺼리를 맡은 이들이 신이나 천사가 아닌 인간들이었다. 신부와 수녀들이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보살피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번에 새로 나온 <천사는 침묵했다>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24년 전에 나온 판본에 같이 실린 단편 <하얀 천사>와 <창녀를 위한 세일즈맨 야크>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해 보자. 뻔히 지는 전쟁인 줄 알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순간에 대해 고민하는 장군의 모습을 보라. 그 명령을 거부하면, 군법에 따라 장군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럴 바에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스스로 뛰어 드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걸까. 어떤 의미도 없이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전쟁의 부속품 같은 존재인 병사들의 애환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인리히 뵐은 자신이 전장에서 직접 경험한 체험을 바탕으로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전쟁이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말미에 패퇴하는 병사들 앞에 흰옷을 입고 등장해서 포도주와 빵을 나눠주던 여성이야말로 ‘하얀 천사’가 아니냐는 서술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천사>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창녀를 위한 세일즈맨 야크>에서는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봐도 포주인 신병 야크가 등장한다. 병사들을 집어삼키는 참호전에 투입된 야크는 베테랑 후베르트의 총탄이 빗발치는 청음초에서 대화가 주를 이룬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전선에 투입된 신병의 최후는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천사는 침묵했다>의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전쟁 전에 서점직원이었다고 하는데, 야크란 친구는 세 명의 창녀에게 손님들을 끌어 주고,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 포주조차 전장에 투입할 정도로 제3제국의 처지가 곤궁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런 야크가 전쟁터에서 병사로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의미 없이 소모되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저자가 구사하는 생생한 반전 메시지는 탁월하다. 사실 내가 기대했던 폐허문학의 리얼리즘에는 좀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스는 전쟁 기간 중에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결코 밝히지 않는다. 그에게, 독일 민족에게 과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표현일까? 과거와 폐허를 딛고, 생존과 번영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나라는 현실적 고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명징하지 않고 모호한 전개에 대해서는 대가가 되기 전인, 아직 삼십대 초반에 쓴 글(1949년/1950년으로 추정)이라 그런 지도 모르겠다. 그가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1949년이니 거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천사는 침묵했다>는 하인리히 뵐이 죽은 뒤, 1992년에 발표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