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계획
카란 마하잔 지음, 나동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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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타가 또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최근에 나온 제시 볼의 <센서스>를 읽기도 전에 나는 4년 전 문학동네 창고털이 이벤트에서 업어온 카란 마하잔의 <가족계획>이 떠올랐다. 분명 가져온 기억은 나는데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책을 골랐을까? 이틀 전 서가를 뒤져서 책을 찾아냈고 바로 읽기에 돌입했다. 너무 재밌어서 줄리언 반스의 요리 에세이 그리고 제시 볼의 신간은 뒷전으로 밀렸다.

 

내일은 우리 달궁 독서모임이 있는 날로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을 안주로 삼을 예정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카란 마하잔이 울프 샘을 스승으로 모신다나. 나는 울프 샘이 타블로의 샘으로만 알았는데 대단하구만 그래. 여담이었다.

 

<가족계획>은 미국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자라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스탠포드에서 울프 샘에게 배운 카란 마하잔이 2008년 그러니까 저자가 24살 때 발표한 데뷔 소설이다. 그리고 후속작은 무려 8년 만인 2016년에 나왔다. 이 친구도 과작을 하는 모양이다.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2017년 미국 소설 유망주로 꼽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됐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도 델리다. 소설의 주인공은 집권당 소속 정치인 도시개발부 장관 라케시 아후자와 그의 맏아들(16세 소년) 아르준이다. 라케시는 사랑하는 첫 번째 아내 라시미와 사별 뒤 아들 아르준을 데리고 지금의 아내 산기타와 결혼해서 무려 12명의 자녀들을 생산했다. 아르준의 학교 친구들은 아르준의 동생들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모르고 그를 “찢어진 콘돔”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른다. 아마 동생이 12명이고 조만간 한 명이 더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상해 보이는 정치인 라케시의 비밀은 임신한 아내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어젯밤에도 아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장남 아르준에게 그 장면이 딱 걸렸다. 세상에나. 이거야말로 발칙한 이십대 청년이나 쓸 수 있는 서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독자로서는 너무 재밌는 설정이다. 미치겠구만.

 

한편 아르준은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같이 타는 아르티라는 소녀에게 흠뻑 빠졌다. 그녀를 꼬시기 위해 아버지가 건설 중인(총체적 실패로 귀결됐다) 고가도로의 아이들인지 뭔지 하는 하드 록 그룹을 결성해서 “록 스타” 행세를 하며 아르티에게 매력발산을 시도한다. 십대들이란. 저자도 잘 모를 시절에 나온 본 조비의 “Living on a Prayer"를 마구잡이로 불러 대고, 메탈리카의 명반 <Master of puppets>를 언급하다니, 고작 저자가 두 살 때 그들이 이룬 위업을 과연 알고나 하는 말일지 나는 그 점이 참으로 궁금했다. 역시나 발칙한 친구가 아닐 수 없다.

 

아후자는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죽은 라시미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신부바꿔치기로 원래 자신이 재혼 상대로 점찍은 아샤가 아닌 산기타와 결혼하게 된 비운의 운명 등에 대한 내러티브가 차례 대로 등장한다. 어라, 그런데 이런 설정들이 21세기 미국인들에게는 참신하게 다가왔을 진 모르겠지만 이미 오르한 파묵이니 하는 작가들이 써먹었던 게 아닌가. 그래서 내게는 좀 클리셰이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아후자가 깽판을 치고 바로 결혼을 파토냈다면 이야기가 전개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우선 섹스나 하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한 라케시는 그후로 줄줄이 아이들을 생산해냈다. 맙소사!

 

<가족계획> 표지에 보면 무드 아홉 개의 낱말들이 부화 중인 달걀처럼 보이는 물체 위에 적시되어 있다. 결혼, 엄마, 집, 아기, 가족, 인도, 정치, 아빠 그리고 비밀. 어때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탁월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바로 저자 카란 마하잔이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바로 이 아홉 단어들 속에 구축해 놓은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원하지 않는 결혼에서 파생된 자그마치 12명이나 되는 아기들, 인구팽창으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인구대국이 된 인도의 현실을 빗댄 서사는 압도적이다. 아 그리고 보니 인도를 다룬 소설 중에서 유일하게 카스트 제도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역시 스탠포드에서 배운 이는 그런 클리셰이를 타파할 줄 알았단 말인가.

 

인도판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가 라케시가 숭배하는 여성 총리에게 발탁되어 신임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설정도 코믹 그 자체다. 하긴 어느 나라에서는 대통령 역을 연기하던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돼서 의회해산을 선포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는 막무가내식 정치를 선도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현실이 픽션의 세계를 능가한다는 점이 초현실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료 의원을 음해하고, 자신의 사퇴를 발판으로 삼아 총리를 협박하는 정치인 라케시의 뻔뻔함은 우리네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기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카란 마하잔은 로힌턴 미스트리나 아룬다티 로이 혹은 줌파 라히리와는 다른 결의 인도에 대한 스토리를 전개한다. 인도계 선배들이 좀 더 진중한 스토리를 다룬다면, 카란 마하잔은 블랙코미디를 바탕으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날카롭게 쏘아 붙인다. 물론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정은 아니지만, 대가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를 비롯해서 세대간의 소통 문제, 출생의 비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밑밥으로 깔고 풍성한 정찬을 준비한다. 미국 내셔널북어워드 최종심에 올랐다는 카란 마하잔의 두 번째 소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아니면 원서를 중고로 사볼까나, 물론 가독 능력은 안되겠지만 소장용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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