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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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처음에 출간되었을 적에는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었는데, 아마 어느 방송인지 팟캐에서 소개된 다음에 다시 인기를 끈 모양이다. 내가 8년 전에 읽고 쓴 리뷰가 그렇게 북헌터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들에게 책을 팔라는 정중한 제안을 이메일로 받기도 했었다. 물론 책은 팔지 않았다. 원래 심리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출판사에서 같은 역자로 재출간되었는데 기존의 버전과 어떤 변별력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8년 만에 앤드루 포터의 전설이 되어 버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다시 읽었다. 여기서 킬포는 바로 다시. 그렇게 수도 없이 책을 읽어대는데 8년 전에 읽은 기억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까? 전혀 아니올씨다였다.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만나는 책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마치 장삼봉 선생에게 태극권을 전수받던 장무기가 태극권의 초식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그럼 느낌이랄까. 언제나 새 출발은 좋은 법이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모두 10개의 삶을 관통하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단편들의 화자들은 모두 1인칭의 나이다. 어디선가는 알렉스로, 폴 아저씨로 불리는 내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앤드루 포터 작가의 그것을 따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친구 탈이 구멍에 죽은 사건은 어른으로 성장한 나에게 여전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기억은 사실마저 왜곡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의 실수로 구멍에 빠져 죽은 친구 대신,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라는 냉혹한 사실로부터 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뜻언뜻 비치는 미국 서브컬처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묘사가 생경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을 꿈꾸던 아버지와 변호사 어머니의 예정된 결별을 목격하는 자식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꿈을 추구하는 이와 현실의 견고한 벽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가 한 때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그 갈등 속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어머니를 비난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 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그동안 형성된 가치관 때문에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전도유망한 미래의 의사이자 피앙세 리처드와 에스파냐 여행 중에 결혼을 앞두고 결별선언으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에이미 누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또 어떤가. 자신이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는 그 무엇으로도 메워질 수 없었다. 유사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톰의 모습이 그러니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혼전계약서니 투자실패니 하는 것은 그런 부정적 감정의 당위를 위한 설정으로 읽힌다. 진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의붓아버지의 존재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귀결될 뿐.

 

다양한 형태로 분화 중인 미국 가정의 형태는 <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이 11년 전에 발표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더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는 아술이라는 벨리즈 출신 교환 학생을 1년간 집에 들인다. 이 아술이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가정에 핵폭탄을 터뜨리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다만 그 시점이 언제냐는 것 뿐. 녀석은 동성친구 라몬과 기묘한 관계 속으로 빠져 들고,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대마초를 피우고(아마 지금은 합법화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음주를 꺼리지 않는다. 부모가 아니면서 동시에 외국인 교환 학생 아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아내 캐런과 나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가정마다 다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머킨>에서도 저자는 평이함 가운데 특별한 무엇을 끄집어낸다. 이웃에 사는 연상녀 린의 가짜 애인 행세를 하는 특수학교 교사 나에게는 호세라는 특별한 학생이 있다.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발표하겠다는 호세의 고집만큼이나 린의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가짜 애인 리허설을 하는 장면도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고 보고 싶은 것만을 원하고, 그걸 아는 이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아마 그에 대한 좋은 예로는 <굿바이 레닌>만한 영화가 없을 것 같다.

 

이웃집 벤틀리 부인을 사랑했던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애인이 있으면서도 빛과 물질에 대한 물리학 강의를 하던 노년의 교수님과 사랑에 빠진 나 헤더의 이야기 등 견고한 일상에 바늘 하나 만큼의 균열을 잡아내는 십년 전 신예 앤드루 포터가 구사하는 서사는 이 방면의 대가 제임스 설터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다시 한 번 나는 묻게 된다. 과연 나는 얼마만큼 삶의 진실에 다가가 있는지 그리고 내가 삶의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진실은 아니 믿고 싶은 진실은 진짜냐고. 빛과 물질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이 순간에 그게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서도.

 

앤드루 포터는 지금까지 딱 두 편의 작품만을 세상에 소개했다. 2008<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리고 2012<어떤 날들>. 후자는 전자만큼의 아우라를 내지 못하고 입소문도 그만 못한 느낌이다. 정말 오래 전에 사서 아직까지도 읽지 않은 <어떤 날들>을 읽어 보고 싶어졌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앤드루 포터 씨, 신간을 좀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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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15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절판됐다가 이번에 새로 나온 숨은 명작이군요. 늦게 독서에 눈 떠 읽고싶은 책은 많은데 이렇게 계속 쌓이니 마음만 급하네요 ㅎㅎ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05-16 17:19   좋아요 1 | URL
입소문이 자자해서 결국 새로운 출판사
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앤드루 포터 작가도 과작하시는 양반이라
책이 많이 없네요.

다시 읽어도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