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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책 - 옹정제와 사상통제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래 전에 산 책이다(2010년 12월 1일). 그리고 처음에 산 책은 찾을 길이 없어 결국 중고서점에서 4년 전에 다시 샀다(2014년 3월 31일). 그리고 내내 책꽂이에서 묵혀 두었다가 이번 크리스마스날 집어 들었다. 하루 저녁 사이에 절반을 읽어 내렸다. 미국 예일대 출신 중국사 전문가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저술한 1728년 벌어진 쩡징의 역모사건을 다룬 <반역의 책>에 대한 출발이었다.
옹정 6년(1728년) 10월 28일 시안성의 촨산총독 웨중치[岳鍾琪]에게 역모를 도모하자는 비밀편지가 인편을 통해 전달된다. 전제국가 중국에서 천자에 대한 반란만큼 중요한 사건이 있을까? 중국 송대의 명장 웨페이(악비)의 후손 웨중치에게는 이미 전적이 있었다. 망한 명나라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15개월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 이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한 상황에서 멸망한 한족국가의 부흥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웨중치는 편지 심부름꾼 장시를 달래, 편지를 보낸 이가 후난성 융싱현에 사는 그의 스승 쩡징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황제였던 옹정제는 선친 강희제 사후, 즉위 과정에서 순탄하지 않은 황위계승전을 치러야 했다. 제국을 계승할 후계자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수많은 황자들은 제위에 오르기 위한 보위 쟁탈전을 통과해야만 했다. 4황자 윤진이 제위를 계승하는 과정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쩡징이 웨중치에게 거병을 권하는 편지에도 현재 황제가 부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올랐다는 음모론을 필두로 해서 술고래에 황음무도하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에,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론을 접목시켜 역모를 꾀했다.
쩡징의 왜곡과 달리 13년에 걸친 옹정제의 치세는 비교적 명군의 그것에 가까웠다. 45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는 하루 평균 4시간의 수면만을 취하며, 나머지 시간들을 정사에 바쳤다. 즉위하면서 정치적 라이벌들이었던 형제들을 숙청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기 시작한 옹정제는 군기처에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신권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지방 총독과 순무들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주접에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붉은 먹물로 주비를 달아 지방통제를 강화했다. 쩡징의 역모 사건에 있어서도, 주비유지 제도를 활용해서 신속한 대응을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붉은 주비의 비가 내린다는 표현을 사용했던가.
통신과 정보 전달 시스템이 현대처럼 발전하지 않았던 18세기 초반, 황제의 명령이 지방에 전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독재권력을 자랑하는 황제의 신임을 얻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방관들은 자신이 가진 재량권을 총동원해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쩡징의 역모 편지에 등장하는 13명의 인사들을 수배해서 체포하는 과정은 정말 한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쩡징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면서 옹정제는 그렇지 않아도 저장 지방의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편견을 갖고 있던 차에 이번에는 주모자 쩡징이 근거한 후난성에도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저장과 후난 지방에 풍속감찰관이라는 제도를 도입했을까 싶다. 쩡징 사건을 계기로 해서, 민간에 유포되는 터무니없고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단속하고자 했지만 역설적으로 황제의 해명은 유언비어 제작소에 땔감을 던져주는 격이었다. 한 마디로 절대통치자의 민간에 대한 사상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절대군주 시대 문자로 남긴 기록들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주자학 해석에 탁월했던 학자 뤼류량[呂留良]이 남긴 일기와 문집을 접한 황제는 한족을 청나라 지배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다수의 한족 지식인들이 만주족의 청나라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청나라는 정통 중화론의 기준으로 볼 때, 오랑캐 다시 말해 금수의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던가. 청의 황제들이 제 아무리 지배의 정통성을 강조하더라도, 한족들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다.
옹정제가 파견한 조사관들을 체포된 쩡징을 심문한 결과, 그가 범용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쩡징은 진사 출신이라는 가짜 왕수가 퍼트린 유언비어와 항간에 떠다니는 청조 지배 아래 벌어진 자연 재해를 흉조로 판단해서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장시를 시켜 웨중치에게 전달한 편지에서 청조의 혹정을 비판하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명나라 시절에는 무능한 한족 황제들의 혹정이 없었던가? 오히려 청나라의 안정적 지배 아래, 황제들은 천하에 재난이 발생하면 구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가. 현실세계를 도외시한 지식인들은 그저 고대 주나라의 정전제 같은 고법으로의 회귀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성인 공자가 언급한 화이론의 선구자 관중에 대해서도 이중적인 판단은 존재한다. 주자학적 질서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던가. 하지만 관중은 처음에 공자 규를 보필하다가, 공자 규가 죽은 다음에는 소백을 주군으로 모셔 훗날 제환공의 재상이 되었다. 어떤 주군을 모시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억조창생을 위한 좋은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유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니냐는 옹정제의 사고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강희 연간에 발생한 문자옥에 대한 청나라 조정의 대응은 강력한 탄압이었다. 하지만 선친 황제에 비해 정치적으로 고수였던 옹정제는 무자비한 탄압 대신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관용이었다.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반청사상으로 똘똘 뭉친 뤼류량의 경우에는 부관참시와 자손들까지 대청률에 따라 엄하게 처벌했지만, 정작 역모의 주모자였던 쩡징과 장시는 사면하고 심지어 천냥되는 은자까지 지급하는 대범함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상유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온 쩡징의 반성문을 엮은 <대의각미록>을 인쇄해서 천하에 배포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황제의 이런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과연 성공했을까? 옹정제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유포되는 유언비어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민중은 오히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권력암투, 골육상쟁 같은 막장 스토리를 즐기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천하의 독서인들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기에 오히려 맞대응에 나선 밀정정치의 달인이자 독재군주 옹정제의 시도가 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군주의 시대,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불온한 사상의 중요 전달 방법이었던 서책의 유통과 소장은 목숨을 담보한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대현(大賢)으로 인정받는 뤼류량의 자손들도 결국 문자옥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던가.
옹정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청년 황제 건륭제는 황고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작고한 옹정제는 역모자 쩡징과 장시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건륭제는 천하의 두 죄인들을 잡아 들여 능지처사로 처벌하고, 가산을 몰수해 버렸다. 아울러 천하에 유포된 수십만권의 <대의각미록>을 금서로 지정하고 회수해서 폐기해 버렸다. 이 또한 반대급부를 불러왔는데 선대에 민중들이 <대의각미록>에서 자신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부분들만 왜곡해서 수용했다면, 건륭 시대에는 민중들이 금서로 지정된 <대의각미록>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황제가 폐기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책이 없어졌다고 해서 수년간 매달 두 번씩 강의 형태로 민중에게 유포되던 책의 내용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황제의 의도 대로 순식간에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대의각미록>은 일본에까지 유포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건 초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촨산총독 웨중치는 옹정제의 강력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준가르부 정벌 실패 때문에 삭탈관직 당한다. 1731년 가산도 몰수당하고, 사형 판결까지 받았다가 감형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건륭제가 즉위한 뒤, 복권되었다. 독재 군주 시대에 제왕의 총애가 얼마나 덧없는지 웨중치의 경우를 통해 잘 알 수가 있었다.
수년 전 보수정권 아래 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책들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서 같은 서적들이 무슨 이유로 “불온서적” 다시 말하자면 현대판 금서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온라인 서점들에서는 그런 책들을 모아 활발한 마케팅을 시도했다. 어떤 작가는 우스개 소리로 왜 내 책은 불온서적으로 지정이 되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정자들의 어리석은 시도가 성공한 적이 없다는 걸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