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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알약 - 증보판 ㅣ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평점 :

이사를 한 달 앞두고 책 정리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그림소설 <푸른 알약>은 처분 대상이 되었다. 그전에 읽고 나서 기록을 남기려고 아침에 부리나케 읽고 리뷰를 쓴다.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만화가 프레드다. 그의 여자친구 카티는 에이즈 양성보균자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더라. 친구를 따라간 파티에서 그녀를 만났던가. 풀장에서 거침 없는 행동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지. 그리고 우연이 이끄는 대로 파티와 거리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 프레드. 카티는 프레드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에이즈 환자라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역시 에이즈 환자라는 걸.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관계는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을까. 하지만 프레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계속한다는 거지. 일단 놀랍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다가올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 프레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운명’이라고 했지 아마.
아이에게 프레드는 아빠가 아니다. 아이가 없는 여느 청년처럼, 프레드 역시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의 가족이 되어, 병든 몸의 아이를 보살피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카티가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인 아이에 대해서도 동정, 아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키워 나가지 시작한다. 그렇지 이런 상황이라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동정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또 한 편으로는 카티와의 스토리가 프레드에겐 하나의 소재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감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세상에서 너무 닳은 모양이다. 세상 탓을 해야 하나.
갑자기 바이러스 수치가 급상승해서 아이에게 시멘트 맛이 나는 독한 약을 먹이는 과정도 리얼하게 그려진다. 이 부분이야말로 그림소설의 강점이 아닐까. 좀 더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순화시킬 수 있다는.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돌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 모를 것 같다. 그런 고통의 순간들의 총합이 결국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게 아닌가.

어쨌든 프레드는 에이즈에 걸린 카티와 아이를 돌보면서 일상을 영위해 간다. 관계하던 중에 얇은 막으로 만들어진 콘돔이 찢어지면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화도 인상적이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닌가. 에이즈 환자라고 해서 성욕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엄청난 걱정, 아니 당장 눈 앞에 닥친 죽음에 대한 고민을 들고 의사를 찾은 프레드에게 의사 선생님인 에이즈라는 질환에 무지한 이들에게 프레드가 감염될 확률은 진료실 밖으로 나갔을 때, 흰 코뿔소를 만날 정도라고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문 앞에서는 흰 코뿔소를 만나는 유사체험을 한다.
그렇게 프레드는 카티와 아이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셋이서 방콕 여행을 떠나는 장면으로 그림소설 <푸른 알약>은 끝을 맺는다. 그런데 나는 좀 더 궁금하다. 그들의 운명이. 과연 카티와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프레드는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것 같던데. 수년 동안 나의 서가의 한 구석을 차지해 온 그림소설 <푸른 알약>과 헤어질 순간이 되었구나. 이젠 안녕 친구.
*** 책 판매는 실패했다. 처음에는 상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직원 분이 더 자세히 살펴 보더니 책 옆에 곰팡이가 슬었다고 매입불가 판정을 내려 주셨다는. 할 수 없이 쿨하게 기증이나 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