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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개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애정하는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시집을 읽었다. 나는 시집을 읽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읽는다. 이번의 경우에도 내가 애정하는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아 보겠다는 의도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다. 다른 유작 소설집은 사서 읽었다. 나의 예상 대로,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내가 뭘 읽었나 싶다. 사실 졸려서 비몽사몽 간에 읽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모두 43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 <낭만적인 개들>에는 희한하게도 볼라뇨의 모국어인 스페인 어 시 원문이 좌측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영어는 그나마 어려서부터 접해서 대충 맞춰서나 볼 수 있지, 그런데 스페인 어는 도통 좌와 우를 맞추어 보려고 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한국에 출간된 책 중에 스페인 어 원문을 게재한 시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량 때문에 출판사에서 스페인 어를 실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감출 수가 없다.
칠레 출신으로 표제작 <낭만적인 개들>에 등장하는 시구처럼 “나라를 잃은” 청년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나 국제적 유랑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멕시코 아니 메히코는 볼라뇨에게 제2의 조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나라는 다르지만 스페인 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말만 통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교육도 받을 수 있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가라면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각광받는 문학 작품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부럽게 다가왔다.
볼라뇨의 시에 등장하는 하얀 굼벵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하얀 굼벵이라는 녀석을 등장시킬 걸까? 난 아마 살면서 한 번도 하얀 굼벵이를 본 적이 없는데. 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군의 마지막 격전지 중의 하나인 헝가리 벌라톤 호수라는 지명이 뜬금 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볼라뇨는 벌러톤에 가보았을 걸까? 아니면 그냥 문학적 상상력일지 궁금하다.
도발적인 청년 시인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님에게 공산주의 천국에도 동성애자들과 각종 성적 유희를 일삼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냐고 묻는다. 내가 보기에도 시인은 유물론자 같은데, 여전히 자신의 정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적 색채를 떨칠 수가 없었나. 아니면 이것 역시 하나의 상징계로서 작동하는 문학적 시도 혹은 도발이려나.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작고한 시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의 답답증은 더해만 가는구나.
시를 읽다가 흥미롭게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자신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등장하는 루페, 에드나 리베르만/에디트 오스테르 그리고 자신을 페르소나화한 아르투로 벨라노 같은 이름들 말이다. 자신의 창작물을 울궈먹는 고전적 기법인지 아니면 서로 상호보완하는 보속적인 참신한 시도인지 시의 문외한으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시집을 통해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루벤 다리오의 시집도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전히 나는 도대체 누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의 시를 읽을지 궁금하다. 그런 책들을 꾸준하게 출판사들의 패기도 대단하고.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는 검은 오토바이를 당나귀에 비유한 장면도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리뷰용으로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산문에 가까운 볼라뇨의 시들은 난해하기만 하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으리라. 나의 시독해 능력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절대적으로 함량부족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읽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만족하다고 자평한다. 나의 볼라뇨 읽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