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어제 신문기사를 통해 유디트 헤르만이라는 독일 출신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아쉽게도 민음사에서 모클 시리즈로 나온 작가 책 세 권 중에 두 권이 절판되었다. 오늘부터 패밀리 세일 들어간다고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목록을 검색해 보았으나 역시나 없다. 일단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단지 유령일 뿐>은 주문했다. 대한통운이 파업 중이라던데, 당일배송이 가능할까부터 걱정이 되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걱정이 아니라. 그렇게 난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냉큼 도서관으로 달려가 절판된 책 <알리스>와 <여름 별장, 그 후>를 빌려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처럼 죽음의, 사신의 그림자가 소설 시작에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은 베를린에서 죽어가는 옛 연인 미햐를 간호하기 위해, 아니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츠바이브뤼켄으로 달려온 알리스다. 그런데 미햐에게는 아내 마야도 아이도 있다. 굳이 알리스가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암으로 죽어가는 옛 사랑 앞에서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이를 데리고, 마야와 알리스가 잠시 묵을 집을 찾아다니는 장면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기묘한 것은 미햐와 알리스의 관계가 종언을 고했을 때, 바로 마야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달라질 건 없겠지만. 결국 미햐는 죽었고, 마야와 아이 그리고 알리스는 베를린으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나니 모든 일이 가능했다(42P).

 

두 번째 <콘라트> 편에서는 루마니아 남자 그리고 안나와 함께 이탈리아 몬테발도 산이 보이는 가르다 호수 부근에 사는 지인 콘라트와 로테 부부를 찾은 알리스의 이야기다. 사람 좋아 보이는 콘라트 씨는 고열로 곧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70세의 콘라트 부부에 비하면 젊은이인 45세의 알리스는 친구들과 누오보 폰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살인적 비용을 감수하면서. 그런데 알리스와 콘라트는 도대체 무슨 사이지? 어떤 사이길래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걸까? 그 질문에 대해 알기도 전에 콘라트에게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실컷 술파티를 벌인 알리스 일행이 콘라트가 입원한 병원으로 로테를 데리고 차를 몰고 갔다가 그 유명한 가르다 호수에서 수영을 즐긴다.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축복을 한껏 즐기는 모양이다. 그것이 삶의 피할 수 없는 모습일까. 일행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넣고, 돌로미티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콘라트는 영면에 든다. 정원사가 이탈리아 말로 그들에게 콘라트 씨의 죽음을 알린다. 비타 브루다, 그렇지 인생은 끔찍한 거지. 콘라트는 관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갔다. 남은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삶의 순간들을 영위한다.

 

다음 주자는 리하르트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르가레테가 전화해서 알리스가 담배와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 리하르트를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틈을 낼 수가 없었던 걸까. 알리스는 두말 하지 않고, 독서삼매에 빠진 라이몬트에게 알리고 집을 나선다. 리하르트와 마르가레테에게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담배 두 갑과 생수 두 병을 사서 주황색 봉투에 담아 배달한다. 그런데 또 알리스는 리하르트 부부와 어떤 관계지? 전편에서 콘라트 씨는 전염성 질환으로 돌아가신 것 같은데, 리하르트의 병명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 그가 자리에서 죽어 가고 있는지. 집으로 돌아온 알리스는 라이몬트는 얼음처럼 차고 달콤한 맥주를 마시고,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호수를 찾아 수영을 한다. 그전 이야기들에서 부겐빌레아와 협죽도가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름 모를 푸른 꽃이 등장한다(네번째 말테 삼촌 이야기에서는 11월 개나리다). 물론 꽃 이름은 모르겠고. 마르가레테는 리하르트가 죽기도 전에 햄버거 스테이크와 맥주를 제공하는 장례식 준비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죽지도 않은 사람의 장례식 타령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네 문화와는 달라서인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그렇지 않은가. 리하르트가 죽었다는 소식은 결국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에서 죽음이 이렇게 가까울 수가 있는 걸까? 알리스는 사신인가? 그녀가 가는 곳마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알리스가 앞으로 임종을 맞을 이들과의 관계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죽음과 담을 쌓고 살아와서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유디트 헤르만는 기묘하게도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게이 삼촌 말테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프리드리히 씨의 만남도 좀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아는 프리드리히 씨와 만나 무엇을 하겠다는 거지? 사실 자신도 잘 모른다.

 

마지막 망자 라이몬트의 경우는 예전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자신과 함께 살던 남자가 아니었던가. 살아남은 자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알리스는 주변 정리에 나선다. 망자가 남긴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온갖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과의 인연도 같이 정리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신원 불명의 루마니아 남자도 등장해서 사실 좀 반가웠다. 알리스 말고는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그런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런 캐릭터들에 대한 전언을 남긴다. 그런데 라이몬트는 왜 죽었지, 궁금한데 작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것도 명백한 하나의 전략이겠지만.

 

처음으로 만난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의 곳곳에서는 창백한 고독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세상 무심한 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런가 싶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위태롭게 매달린 어느 실존의 모습을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기대했던 강렬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누구나 회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우리네 삶의 단면을 관조하고 변주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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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3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여름 별장, 그 후> 있어요!!! 근데 저걸 언제 왜 샀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어요! ㅋㅋ
<알리스>는 중고서점에서 구해봐야겠어요! ^^
왠지 이 겨울에 어울리는 작가가 아닌가 싶네요~

레삭매냐 2018-11-23 15:38   좋아요 0 | URL
<여름 별장, 그 후>는 어제 <알리스>랑
같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답니다.

어째 책 좀 사서 볼라치면 죄다 품절/절판인지.

<단지 유령일 뿐>은 영화로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서가를 찾다 보면 정말 벼라별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책들이 다 있더군요. 우수수한 계절에 딱
맞는 작가라는 의견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