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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열여섯 살짜리 흑인 남자애가 백인 경찰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만약 내 친구라면? 그리고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전 경험해 보지도 그리고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과연 어떨까 싶다.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인종주의 문제는 미국의 뿌리 깊은 문제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다. 소설의 주인공 스타 아마라 카터는 백인 친구들이 빈민가라고 생각하는 가든 하이츠 출신이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3년형을 살고 출소해서 가게를 운영 중이다. 어머니 리사는 간호사로 18세에 스타를 낳았다. 어쩌면 스타의 가정은 흑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일 지도 모르겠다. 스타의 오빠 세븐은 이복형제다. 스타의 부모는 스타는 어떻게는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자식들을 백인들이 다니는 윌리엄슨 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흑인이라는 카터 가족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걸까? 크리스 브라이언트라는 백인 남자애와 사귀고, 헤일리와 마야 같은 백인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총에 맞은 죽은 어린 시절 절친 칼릴 해리스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설상가상으로 스타는 더 어렸을 때, 삼총사 중의 하나였던 나타샤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도 문제지만, 총기규제도 좀 더 쎄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남긴 증오>에는 인종주의와 총기규제 등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도가니탕일 지도 모르겠다.
경찰로 주류 백인사회에 편입된 스타의 삼촌 카를로스는 스타를 설득해서 경찰서에 와서 진술을 하라고 종용한다. 스타가 어려움을 이겨 가며 진술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유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비무장한 흑인 소년에게 세 방이나 총탄을 쏜 백인 경찰을 처벌하라는 흑인들의 요구가 폭동에 준하는 폭력을 수반하고 거세게 발생한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이 적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헤일리와 마야가 스타에게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칼릴을 아느냐고 묻는 말에 스타는 모른다고 거짓말한다. 거짓은 언제나 더 큰 파국을 몰고 오는 걸 스타가 과연 몰랐을까. 텀블러 친구맺기가 끊어질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스타는 진실을 친구들에게 사전에 털어 놓아서 우정의 미세한 균열을 막았어야 했다.
마약 중독자 브렌다의 아들인 칼릴이 어떻게 해서 마약 거래상이 되었는지 스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리에 나온 흑인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범죄 조직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휴대폰이나 농구화 같이 아이들이 너무나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사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흑인 갱단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런 칼릴을 마약 거래상으로 몰아 당연히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유와 정의가 넘쳐흐른다는 민주주의의 본 고장 미국의 진짜 모습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정말 거지 같구나.
T.H.U.G. LIFE
스타의 엄마 리사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에게 들려준 미국 흑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야말로 이 책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저자 앤지 토머스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일을 하더라도, 일은 어디에선가 꼬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옳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약과 갱단이라는 일상적이고 구조적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 스타의 아빠 빅 마브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들이 거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을 원하겠는가. 또 하나의 역설은 스타의 엄마 리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두가 가든 하이츠 같은 빈민가의 삶이 싫다고 해서 떠나 버린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우직하게 빅 마브처럼 마을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는 음지의 활동가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투팍이 한 말을 인용해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분노와 증오로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칼릴 해리스를 쏜 경관 I-15 브라이언 크루즈 주니어가 대배심에서 풀려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과연 미국 사회에 정의는 살아 있는가? 16살짜리 꼬마 흑인 소년의 목숨보다, 어이 없는 이유로 총을 쏜 백인 경관의 목소리가 더 가치있게 들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 앤지 토머스는 분노와 증오 같은 감정적 대응 대신 이성적인 판단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과연 내가 만약 칼릴의 형제였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앤지 토머스는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와 폭력에 대한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가든 하이츠 출신 스타는 주로 백인들이 다니는 윌이엄슨 고등학교에서 백인 친구들과도 무리 없이 지내야 하고, 또 집에 돌아와서는 빅 마브와 리사의 딸로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지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때, 빅 마브의 딸 스타는 “우리의 목소리가 무기”다라는 주장에 동조해서 경찰서에 출두하고 진술을 하고 대배심에 나가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멋졌다.
Do the right thing!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