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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흑인과 훈장 ㅣ 창비세계문학 33
페르디낭 오요노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평점 :

수년 전에 우리동네 책잔치에서 <창작과 비평> 정기구독을 하면 책을 두 권 준다고 해서 데려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페르디낭 오요노의 <늙은 흑인과 훈장>이었다. 참고로 다른 하나인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은 재작년에 읽었다. 우리 독서 모임 동지인 대장물방울이가 지난 주말에 읽었다는 인스타 포스팅을 보고는 나도 분발해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내 느낌은 비참함이었다. 카메룬 출신 지식인 페르디낭 오요노는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신분으로 이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4년 뒤, 카메룬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의 일이었다. 여전히 카메룬의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메카 로랑 씨는 착실한 기독 교도로 개종하여 자신의 땅도 모두 가톨릭 사제단에 기증하고, 아내 켈라라 사이에서 난 보석 같은 두 아들도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에 프랑스 식민정부에서는 메카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훈장을 수여할 예정이라고 사령관의 특별 호출로 그에게 알린다. 음베마족 출신의 늙은 영주는 프랑스어라고 하고 “예” 한 마디에 할 줄 모른다. 우선 식민통치자들과 소통을 위한 언어부터 장벽에 갇힌 셈이다.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적이 없던 모양이다. 메카 뿐 아니라 일족 모두에게 훈장 수여는 영광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식민지 우두머리 고등판무관에게 훈장을 받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는 게 문제의 시발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재즈 스타일의 서구식 복장과 구두까지 장만해서 훈장수여식에 참가한 메카는 그야말로 땡볕 아래 머리통이 익는 그런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훈장을 받을 때까지 둘러쳐진 원 안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한단다. 더위, 짜증 그리고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요의가 그를 괴롭힌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상황이야말로 식민지 카메룬을 옥죄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언제 카메룬의 음베마족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화려한 건물과 도로 그리고 철도를 깔아 달라고 부탁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지어진 관청이나 백색 건물들을 흑인들에게 공여한 적이 있었던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질 좋은 카카오를 수탈해서 초콜릿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지, 노동집약적 생산품인 카카오 재배나 수확, 건조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흑인들이 부자가 되는 걸 방해하고, 같은 백인인 그리스인들에게 이권을 주고 메카가 받게 되는 성 크리스토프 메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폴레옹이 개발한 희대의 상품 레지옹도뇌르 훈장은 깍쟁이 그리스인 피피냐키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매제 엥감바가 가져온 염소를 잡아 잔치를 벌일 테니, 고등판무관도 참가해 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피피냐키스의 유럽식 파티에 백인 우두머리가 참가했을 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과 흑인 음베마족의 공존은 물건너 갔다. 식민 지배자들이 보이는 위선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 축하연이 열린 양철로 만들어진 아프리카의 집에서 독주에 취해 널브러졌다가 잠이 깬 메카가 아수라장 가운데 훈장을 잃어 버리는 장면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메달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게 곧 이어진 비극의 전주곡처럼 다가온다.
한밤중에 원주민 구역이 아닌(분리정책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백인 거주지역에서 얼씬거리다가 무쇠 같은 손을 가진 원주민 위병에게 사로 잡혀 그야말로 봉변을 당한다. 자신이 착실한 기독교인이며, 백인 선교단에 땅을 기증하고, 두 아들이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해서 위대한 프랑스 혁명기념일(7월 14일!)에 성 크리스토프 메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위병들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다. 또 어떻게 보면, 지금은 더 가속화되었지만 농경사회 시대 노인들의 지혜는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참고사항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절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모욕과 매타작이나 더 당하지 않는 게 메카로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백인 경찰서장 ‘새 모가지’ 바리니 씨가 그의 신원을 보증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돌풍의 잔해가 널린 음베마족의 거주지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식민지배가 끝나고 마침내 독립을 찾았더니,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는 탈식민주의 국가들의 불길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혹한 식민지 수탈로부터 탈출했더니, 폭력적 내전과 독재 같은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그런 혼란으로부터 국가와 내 삶을 재건해야 하는 임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독립 이전에 페르디낭 오요노 같은 지식인을 비롯한 카메룬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이런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면, 분명히 그래도 예전에 프랑스가 지배하던 시절이 좋았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경제위기를 부추기는 보수언론 플레이에 놀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결말에 도달해서 메카가 자신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노예가 되는 길이었다는 고백하는 장면을 살펴 보자. 종교 역시 소설 <늙은 흑인과 훈장>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현재 2천 4백만 인구 중의 45% 가량이 가톨릭/개신교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와 독일의 식민 지배 때문일 것이다. 메카의 아버지는 자기 부족의 땅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과 투쟁한 전사였다. 그런데 그 아들은 아버지가 피땀으로 지킨 땅을 백인 선교단에게 기부했다. 백인들은 음베마족의 친구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친구가 될 생각이 그야말로 1도 없었다.
위선의 태양 같은 방데르메이에르 신부는 프랑스 사업가들의 이윤을 돕기 위해 원주민들의 아끼르 술 대신 포도주나 리큐어를 마시라고 대놓고 미사 시간에 떠들지 않았던가. 원주민들에게 영혼의 안식이 되는 술과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매춘을 종교적 차원에서 비난하지만, 정작 인류에게 무지막지한 재앙이었던 연기폭탄(원자폭탄)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이율배반적인 태도야말로 메카로 대변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다시 조상전래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만든 원동력이었다. 메카의 불행 앞에 아내 켈라라를 비롯한 음베마족의 여인들이 땅을 뒹굴며 통곡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진을 빼자 강가의 악어떼처럼 기진했다는 저자의 서술을 보라. 그야말로 현장 리포트처럼 느껴지지 않던가.
알제리 정복사를 다룬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를 읽던 중에 만난 책이라 그런지 탈식민주의에 대한 공통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시아 제바르의 책이 로맨스와 역사의 교차라고 한다면, 페르디낭 오요노의 스타일은 좀 더 직접적이면서 블랙코미디 방식의 역설을 전방위적으로 구사한다. 식민지 출신 소르본 대학 출신의 27세 청년이 이런 작품을 발표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오요노 선생의 다른 작품의 출간은 아무래도 기대하지 힘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