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요즘 북구 유럽 소설들이 인기다. 노르웨이의 요 네스뵈, 스웨덴의 프레드릭 배크만까지는 읽어 보았는데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는 또 처음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복지천국으로 알려진 스웨덴 사회에도 그늘은 있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게 되면서 고령화 사회는 미래가 아닌 현실이 되었다. 인간이 꿈꾸는 수명연장의 꿈은 실현화되었지만, 노인들이 원하는 사회가 과연 도래했을까?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의 체험을 한 이들이 우리들의 그것보다 욕망이 적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사회에서 그들을 잉여 취급하고 도태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소설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에서는 79세 메르타 할머니가 이끄는 5인조 강도단(나중에 군나르까지 가세해서 6인조로 확대된다)은 사회의 그런 시선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털고, 장물 다이아몬드 습득하고, 은행과 국립박물관을 터는 기행을 선보인다. 물론 메르타 할머니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런 일탈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영국의 숲 속에서 의적활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운 로빈 후드와 조선의 홍길동의 후예를 자처한다. 자신들의 요양원 시절을 되돌아보며, 원하지도 않는 약물과 반강제로 갇혀 지내야 했던 다른 노인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들이 ‘한탕’으로 마련한 어마어마한 부를 나눠 주고자 행동에 나선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현실적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아무리 메르타 할머니의 기획력과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도구들을 직접 개발해내는 발명 천재 할아버지의 뛰어난 실력, 은행전문가 안나그레타의 해킹실력만으로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곳들을 두루 터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말이다.


하지만 걱정마시라.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작가는 사건의 전개가 노인 강도단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세심한 배려를 해두었다. 5억 크로나(우리 돈으로 625억)를 목표로 긴장과 흥분 넘치는 한탕을 연달아 성공시키는 노인 강도단이지만, 도중에 느닷없이 등장한 세관원에게 다이아몬드를 그리고 블롬베리 경감에게 2억 크로나를 갈취당한다. 하긴 전편에서도 한탕으로 마련한 자금을 그랜드호텔 홈통에 두는 바람에 그야말로 허탕을 친 전력이 있지 않은가. 전직 선원 출신의 매력남 갈퀴 할아버지는 이웃의 점쟁이 할머니에게 빠져, 자신을 사랑하는 스티나 할머니와의 애정전선에 불협화음이 들리기도 한다. 은행 일련번호가 매겨진 돈을 세탁하기 위해 경마장을 이용한다는 설정도 참신했다. 이 양반들 이거 보통이 아닌데 그래.


잉엘만순드베리 작가가 구사하는 스토리 전재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노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사회적 인식을 깨고, 그들에게 현대판 로빈 후드의 역할을 부여했다. 아무리 결단력과 기획력으로 무장한 메르타 할머니라고는 하지만, 5인조로 구성된 노인 강도단의 다양한 목소리를 다잡고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게 때문에 메르타 할머니는 계속해서 “인생의 매 순간 외교가 필요한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국가가 모든 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사회복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이 나서게 되었노라는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정면 도전장을 던진 그들의 모습이 훨씬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담으로 ‘귄터 발라프 시니어 프로젝트’라는 말도 등장하는데, 지난여름 독일이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잠입취재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고발했던 암행취재 전문 저널리스트 귄터 발라프의 이름이 등장해서 너무 반가웠다. 노인 강도단이라는 도저히 현실에서 만나볼 수 없을 것 같은 판타지에 현실감각을 잃지 않고 사회비판적 저널리스트의 이름을 매치시키는 잉엘만순드베리 작가의 놀라운 실력과 감각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국가의 봉록을 받으면서 약자들의 편에 서야 하는 블롬베리 경감이 노인 강도단의 2억 크로나를 가로채서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는 설정도 씁쓸했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가 다름 아닌 저명한 변호사라는 점도 그렇다. 정당한 법률 서비스를 받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법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온갖 불법적인 일을 대행하는 그네들의 모습이 과연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궤도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소설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를 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는 노인 강도단이 미국에서 귀국해서 둥지를 튼 베름되 해안가 빌라의 이웃 밴드 에인절스다. 악명 높은 헬스 에인절스의 독립클럽으로 가입을 원하는 우락부락한 폭주족 톰파와 예르겐이 과시하는 미친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메르타 강도단이 보여줄 수 없는 그런 ‘피지컬’을 대신하는 행동대원이라고 해야 할까. 폭주족과 강도단의 조화도 역시 볼만하다. 사실 소설 중반에 도달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으려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개하는가 싶었지만 하나하나 깔끔하게 종착점으로 인도하는 잉엘만순드베리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혹시라도 우리의 의적들이 감옥에라도 가는 불상사가 벌어지지나 않는지 조마조마한 순간도 적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세관원 스벤 칼손의 집요한 추적으로 메르타 강도단의 정체가 탄로날 뻔하고, 메르타 할머니의 의협심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는 위기도 맞지만 능수능란하게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문제들을 해결해내는 장면은 압도적 재미의 원천이었다. 그 이면에는 치매 걸린 할머니로 위장해서 사방에서 조여드는 감시와 포위망을 뚫는다는 노인 강도단의 의표를 찌른 역설의 미학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노인들도 젊은이들처럼 긴장과 흥분 넘치는 일단의 ‘한탕’을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점을 잉엘만순드베리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마다의 숨은 가족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하면서 앞으로 이어질 메르타 강도단, 아웃로 올디스(Outlaw oldies) 클럽의 계속될 스릴 모험의 전조를 제시한 점도 고무적이다. 메르타 할머니들의 활약을 보니, 어쩌면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곧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10-2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빠! 근데 진짜 전방위적인 독서가 인정 ^^

레삭매냐 2018-10-26 13:04   좋아요 1 | URL
전방위는요... 마구잽이 독서죠 -
게다가 소설 위주의 편식쟁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