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맥베스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호가스 출판사에 수년째 계속 중인 셰익스피어 다시쓰기 프로젝트의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다가 이번에 7번째로 나온 요 네스뵈가 다시 쓴 <맥베스>를 만나게 되었다. 서구인들, 특히 영미문화권 작가들의 셰익스피어 사랑에 대해서는 더 할 말 필요가 없겠지. 한국계 미국인 이창래 작가는 자신의 장편소설 제목을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따올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작고한 지 수백 년이나 된 작가에 대한 저작권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도 물론 <맥베스>를 읽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마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의 하나로 읽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법이지. 그래서 요 네스뵈가 1970년대 칵테일과 파워라는 마약이 판치는 파이프라는 범죄도시를 배경으로 한 신판 <맥베스>를 읽으면서 간간히 오리지널 <맥베스>에 대한 대략적이 줄거리도 살펴봤다. 왕이 될 거라는 여신 헤카테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는 아내 레이디의 충동질에 따라 주군 덩컨을 죽이고 주변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처리하면서 마침내 스코틀랜드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물론 그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악당이 아니었던 맥베스는 자신이 죽인 유령들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아, 내가 이 책의 분량에 대해 말했던가? 자그마치 724쪽이나 된다. 그러니 시작하시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으시길. 하지만 이미 해리 홀레 시리즈로 스릴러에 있어 일가를 일군 요 네스뵈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만든 캐릭터와 구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소설은 고아원에서 주인공 맥베스와 함께 자란 더프가 대량의 불법 마약 거래를 시도하려던 노스 라이더 갱단을 습격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특공대 대장 맥베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노스 라이더 갱단을 제압했고, 부패한 전직 경찰청장 케네스를 대신해서 신임 경찰청장이 된 덩컨은 맥베스를 조직범죄수사반장으로 승진시킨다. 어느 사회에서나 계급 문제는 빠지지 않는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파이프 시에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야심찬 덩컨 청장은 자신과 같은 엘리트 계급이 아닌 그야말로 사회 밑바닥 출신의 맥베스야말로 새로운 정의구현을 위한 사도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노스 라이더의 라이벌 헤카테가 맥베스에게 원작에서는 마녀들의 예언과 같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약속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맥베스보다 더 냉철하고 잔혹한 캐릭터의 레이디는 맥베스에게 덩컨을 죽이고 새로운 청장의 자리에 오르라고 부추긴다. 그에 따르는 모든 계획도 그녀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다. 원작자 셰익스피어/요 네스뵈는 신의와 의리 같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리를 강조하기 위해,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위해 인간관계와 배신을 서슴지 않는 인간 군상에 대한 냉정한 현실을 부각시킨다.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신임 경찰청장이 된 맥베스는 정의의 사도에서 집요한 권력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파이프 시의 문제는 높은 실업률(제조업의 부재)과 심각한 환경오염 그리고 보이지 않은 손(Mr. Hand-헤카테)이 비밀리에 대량으로 제조 유통하는 마약 칵테일과 파워다. 일자리가 없는 이들이 마약으로 현실의 고통을 잊고, 두 개의 라이벌 카지노 레이디의 인버네스와 오벨리스크를 드나드는 일상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나서서 무언가 해야 하지만 토텔 시장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재선에만 신경을 쏟는다. 어쩌면 요 네스뵈는 셰익스피어를 다시 쓰면서 그런 정치 경제적 현실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보야, 그러니까 문제는 경제라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정의는 500년 전 이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신물 나게 빼먹은 주제다. 그런데, 정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맥베스가 이끄는 특공대원들 사이에서 회자는 의리는 시중잡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라, 그러면 잠시나마 행복해질 것이니. 끝까지 맥베스와 함께 했던 특공대원 시턴과 올라프슨의 이야기다. 영원한 의리는 역시나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일까. 자신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는 마녀들의 예언에 현혹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파탄에 몰아넣어 버린 맥베스의 어리석은 결정이 가져온 후과를 보라.
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배신이 난무하는 드라마 <맥베스>에 요 네스뵈는 맥베스와 더프의 서글픈 과거 스토리도 빼놓지 않는다. 형제와도 같았던 그들이 훗날 더프의 아내가 된 메러디스 때문에 갈라지게 된 이유, 더 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맥베스가 더프에게 진 빚 그리고 더프의 스위노에 대한 원한 등 복잡다단한 변주가 살인 미스터리의 대가 요 네스뵈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소설의 말미에서 알비노 레녹스 경감의 한방은 정말 최고였다. 그렇게 평화가 찾아온 도시 파이프에 다시 악이 고개를 드밀 것이라는 예언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요 네스뵈가 다시 쓴 <맥베스>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고전의 위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수백 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분석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간단한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주말에 시간을 내서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제 다른 호가스 시리즈를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요 네스뵈의 <맥베스>처럼 재밌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