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 푸시 작가정신 소설향 20
이명랑 지음 / 작가정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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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나의 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 두 권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한 권인 <사랑의 수사학>과 함께 작가정신 출판사의 소설향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난 그 때 왜 이 책을 샀고, 그리고 왜 읽지 않았을까. 5년이 지난 무더운 음력 8월에 나는 문득 재밌는 소설이 읽고 싶어졌고, <슈거 푸시>는 나의 그런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군인의 아내로 21개월 아들 현을 둔 소설의 도발적 화자의 이름은 이소희.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녀의 나이는 27세다. 알다시피 군인 하사관의 월급이 빤한 건 당연지사. 그 중에 일부를 쪼개서 소희 씨는 라틴댄스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라틴댄스 학원의 당당하고 어여쁜 강사를 소희 씨는 나비라고 명명한다. 똥배는 집어 넣고, 아름답고 기왕이면 요염하게를 외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는 제비나비 같고 나머지 선수들은 배추흰나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명랑 작가는 소희 씨의 남편을 너무 단순하게 다룬 게 아닐까. 군인이라는 직업부터 시작해서, 잠자리 서비스까지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없는 돈에 아내보고 어떻게 만들어내서 지인들의 경조사를 챙기라는 그런 이기적인 남자로 몰아간다. 이 책이 언제 나왔나 싶어 보니 자그마치 13년에 나온 책이다. 요즘 이랬다가는 바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내가 무슨 빵셔틀도 아니고, 없는 돈을 어떻게 만들어 내라는 거지.

 

그런데 소희 씨도 남편 김태후 씨도 후덜덜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소희 씨에게는 엄마, 태후 씨에게는 장모님이다. 언제고 외동딸 소희 씨에게 물려 줄 거라는 그 집안의 금송아지 집 한 채가 그녀가 가진 강력한 무기다. 소갈머리 없는 사위는 장모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내 소희 씨를 닦달한다. 어쩌면 이렇게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능한 놈팽이가 또 눈치는 이리도 빠른지. 어쩌면 군이라는 조직 내에서 배운 자신만의 생존 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랑 작가는 군데군데 소희 씨의 과거를 삽입하면서 자신도 강사 나비 씨 같이 어여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해낸다. 그리고 물론 비밀도 있다. 어려서부터 도벽이 있던 소희 씨는 야한 망사팬티, 싸구려 귀걸이 한 짝, 파리 할머니가 건네준 소위 미친 년들이나 입을 법한 빌로드 치마 그리고 옛 애인 찬의 사진 등을 남모래 소중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가끔씩 속담배도 뻑뻑 피워댄다. 친구 혜선이 조장한 대로, 이혼하고 나서 거실에서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보란 듯 피우는 담배가 그렇게 맛있었노라고 이야기했던가.

 

<슈퍼 푸시>는 라틴댄스에서 남녀가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고 떠미는 그런 동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마 그 동작이 아마 달달했던 모양이다. 이름조차 슈거 푸시일 정도니 말이다. 소희 씨가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고민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기원을 작가는 조근조근하게 들려준다. 어려서부터 소희 씨의 엄마는 그녀의 엉덩이를 보며 수차례 결혼과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낳은 할머니에게 배운 거라며 부도덕하다며 비난했다지. 로열 젤리를 독식하는 여왕벌처럼 그 집안의 여왕벌은 자신 하나로 족하다는 듯 딸이 하고 싶은 일들, 다시 말해 소희 씨의 욕망을 거세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결과 소희 씨는 가출도 불사하고, 집에 돌아왔을 적에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는 그런 파렴치한 딸이 진짜 되어 버렸다. 엄마로써 딸의 실수나 잘못을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대놓고 망신을 주다니, 상식적이진 않지만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는 제격이지 않은가. 시시때때로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찼다고 비난투로 말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긴 어려서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을 때, 그 시절 어른들은 그런 비난을 하곤 하셨더랬지. 아니 근데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게 뭐가 어때서.

 

이런 비난이 공공연하게 담벼락을 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는 대로 공부나 하면서,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라는 어른들 나름의 공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요즘처럼 공개적으로 토의를 하고, 사유를 나누며 고민해결을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면 반대급부로 그렇게 엇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어느 날 소희 씨의 비밀 컬렉션이 들통이 나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면서 소희 씨의 비상은 탄력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아무리 이렇게 소소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라도 이런 한바탕 극적인 사건이 있기 마련이지. 거실에 퍼질러 앉아서 남은 세 개의 담배를 태우고, 엄마가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갈구던 히든 카드에 대한 생각을 하던 우리의 소희 씨. 아마 13년 뒤에는 이런 거지같은 집구석 하고 바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본다.

 

딸에게 가부장적 질서를 들이미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라는 점이 특이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정이라는 파시즘 소굴을 통해 유전자에 각인된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욕망을 가진 주체로 거듭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소희 씨의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굴레가 얼마나 강고하고 상상이상이었는지 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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